지리산 바람 소리, 가슴에 이는 바람 소리

우리가 통과한 시간의 터널

 

누구나 자신이 사는 당대가 가장 어렵게 마련이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어떻게 저 시대를 통과해왔나, 아득한 역사의 순간들이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900년 후백제가 개국을 선포할 때까지 백제의 유민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까, 1592년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사는 이 땅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1894년 동학군의 후예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레이황이라는 중국 출신 사학자는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책을 통해 잔잔한 역사의 수면 아래를 응시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역사를 보는 시선이 평범한 우리로서는 격동의 세기가 빚어내는 시간의 용트림에 더 눈이 갈 수밖에 없다.

20세기

, 20세기! 우리가 얼마 전에 통과한 이 세기만큼 땀과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세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찝찔한 냄새가 싫어서일까역사책은 이 시기를 암호화된 숫자로 가르친다. 1905, 1910, 1919, 1931, 1937, 1941, 1945, 1948, 1950, 1953, 1960, 1961, 1980, 1987각기 을사늑약, 경술국치, 31운동,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해방, 남북단정(43 제주항쟁, 여순사건), 625, 휴전협정, 419, 516, 518, 6월 항쟁 등전자에 비해 전혀 친절한 게 없는 부가 설명의 어두컴컴한 행간 속에 우리가 힘겹게, 숨가쁘게 통과하는 사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훌쩍 21세기로 건너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쩌면 아직도 정면으로 응시해보지 않은 시대



지리산 빨치산의 삶과 쓰러져 저 홀로 외줄기 길이 된 나무의 삶이 닮았다

 

정갈하게 행군 삶에 대한 열망


시인 박두규 형과 구례에서 합류, 또다른 일행들이 기다리는 화개로 이동하는 동안 내 시선은 섬진강 물줄기를 쫓고 있었다.

10월말, 먼 것 같지만 금세 겨울 채비가 시작될 것이다, 가을이 되면 산과 들은 제 몸이 머금고 있던 물기를 최대한 말린다. 살을 줄이고 뼈를 단단히 하기 위한 일이다. 그렇게 물이 빠지는 신호가 단풍이나 누렇게 고개 숙인 볏줄기일 터물이 많은 지리산이다, 섬진강에는 지리산이 머금고 있던 체액들이 쏟아지면 가을 홍수가 난다, 여름 홍수와는 달리 땅밑에서 조용히 맑게 이뤄지는 홍수정갈한 가을 물에 행군 문장(秋水文章不染塵)을 평생 소원했던 옛사람들의 이름이 흐르는 강물에 반짝인다.

지금의 내게 있어 지리산은 박두규, 박남준, 이원규 시인이 살고 있는 땅이겠으나, 20세기 초엽 한국사는 구례를 매천 황현(18855~1910)의 땅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것으로 자신이 평생 걸어왔던 학문의 길을 최후로 완성했다. 매천과 면암과 같은 매운 선비 정신마저 없었다면, 경술국치 이후 한반도의 20세기 초엽은 얼마나 보잘 것 없이 쭈그러든 형상이었을까

화개에서 오늘 제5지리산 빨치산 활동터 모니터링모임을 함께 할 분들과 짧게 수인사를 나눈 뒤, 차량 3대에 분승하여 쌍계사 앞을 지나 의신마을삼정마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부슬비가 내릴 조짐이 있어 마음이 좀 급했다. 11명이 일행, 국시모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진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들의 모임활동가들과 공원 관리 전문가 그리고 글쟁이 네 명각기 살아온 영역이 다른 이들이 오늘은 한 마음으로 빗점골 일대 탐사를 목적으로 모인 것이다. 빗점골은 흔히 이현상 비트라고 알려진 빨치산 활동터가 있고,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평탄하게 느껴지는 이현상 비트 가는 길

 

강철 같은 의지, 불꽃 같은 삶에 대한 생각

이현상은 1905년 당시 전북 금산군 군북면에서 태어나 1953년 휴전협정 직후 이곳 빗점골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1963년 행정개편 구역에 의해 현재 충남에 속하지만 그가 태어난 금산군은 백제의 고토였고, 조선조 내내 전라도 진산군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현상은 전라도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920년 결혼한 그의 부인 또한 무주 출신 최문기 여사였고, 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당시 조선 3대 명문고보로 일컬어지던 고창고보에서 1~2등을 다투던 수재이기도 했었다좋은 시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전도유망한 평범한(?) 청년의 모습으로 윤택한 삶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해에 한반도는 실질적으로 국권을 상실했고 그가 숨을 거둔 해에 한반도의 운명은 상처와 원한만을 남긴 전쟁의 폐허 위에서 분단의 길에 들어섰다. 따라서, 이현상 뿐 아니고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생애는 시대의 고난과 절망 위에서 피고 질 수 밖에 없었다.

1926년 보성전문 법학과 재학중 610만세운동으로 6개월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그는 1928~19324년여 투옥, 1933~19385년여 투옥, 1940~19422년여 투옥 등 일제하에서만 12년 가깝게 수인 생활을 했으며, 1948년 여순사건 직후 지리산유격대 사령관을 맡은 이후 1950년 남부군 총사령을 거쳐 1953년 주검이 발견될 때까지 꼬박 5년 동안은 그야말로 풍찬노숙하는 산사람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의 연대기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식민지의 아들로 나고 성장해 조국의 분단 속에서 산화해버린 인물이다.

혹자는 그를 일러 20세기 낳은 전설적인 빨치산들인 체 게베라, 호치민, 마오쩌둥, 바티스타 등과 어깨를 겨룰만한 혁명아라고도 하고, 북에서는 그에게 제1호 애국열사증을 추증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모두 사후 가자(加資)라고 할 수 있다. 죽어 명예를 남기는 삶이 아무리 예우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살아서 겪은 모진 시련을 모두 위무하진 못한다.

시련은 영육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살인지 암살인지 혹은 피살인지, 피살이라면 경찰에 의한 것인지 군인들에 의한 것인지그의 최후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난 그의 말년이 뼛속까지 시린 고립감과 살점을 쥐어뜯는 고통 속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는, 후인들의 바람에 가까울 것이다.

, 세기도 20세기에서 21세로 바뀌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현상이란 이름을 들어본 세대들은 스러지고, 의 얼굴이 프린트된 옷을 걸치고 티없이 맑게 웃는 젊은이들은 늘어난다. 그들에게 빨치산 이야기나 임진왜란 당시 의병 이야기는 크게 변별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가슴에 검을 품고 남쪽 천리길을 달려왔네

 

비가 조금씩 내렸다 그쳤다 하는 동안 우리는 빗점골을 거슬러 오르는 계곡 산행을 계속했다. 그의 주검이 발견되었다는 너덜강과 이현상 비트를 답사하는 길에는 산죽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거기서 더 위쪽으로 빨치산들이 축전지용 소규모 발전을 했다는 폭포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거기부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산길인지라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현상의 주검이 발견된 지 어언 55, 무슨 흔적이 더 남아 있으랴만 일행들은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바위를 들쳐보기도 하고 나무 밑둥치를 들쑤셔보기도 했다. 그 풍경 또한 사실은 스산한 것이었다. 이현상의 최후를 지켜봤을 지리산의 나무나 바위들은 입을 열지 않으니 두런두런, 과연 이곳에서 빨치산들이 발전소를 운용했는지, 이현상의 주검이 누워 있던 바위가 이것인지 저것인지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한 후인들의 안타까움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

이현상 비트에는 누가 붙여놓았는지 이현상의 주검에서 발견되었다는 유시(遺詩)가 코팅 처리되어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리산에 풍운이 일어 기러기 떼 흩어지니 / 가슴에 검을 품고 남쪽 천리길을 달려왔네 / 오직 한 뜻, 한 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 / 철갑 두른 가슴에 붉은 피가 흐르네(智異風雲當鴻動 伏劒千里南走越 一念何時非祖國 胸有萬甲心有血)

한 때 열병처럼 이현상 루트를 답사했던 산객들의 발길도 드문드문한 지금, 지리산 바람만이 마치 독경이라도 하듯 이 시를 읽는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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