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속(), 전통과 현대,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

풍남문 앞에서 팔달로만 건너오면 거의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경기전과 전동성당이다.

 

그리고, 그 사잇길인 태조로를 따라 이어지는 한옥마을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물결치는 것 또한 눈에 들어온다. 맛있는 국수나 팥빙수를 찾아서, 작은 공예품 공방에 머무는 눈길을 따라 걸음도 멈출 때, 사진 찍기 좋은 곳에 발길이 들어서는 자리, 곳곳마다 그 여행객을 응대하기 위해 또 사람들이 움직인다. 쉬는 법이 없다.이 거리에는 천 년 전에도 이와 같이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것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것이고 때로는 한적하기도 했겠지만, 이 거리가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오가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자리였음에는 지금과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 다만, 옛 사람들은 시간 속에 스러지고, 지금은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일 뿐

 

역사란 이렇게 흘러가는 사람들의 물결을 총칭일 터, 사람들의 자취가 가뭇없으니역사의 흔적을 좇는 우리 눈길은 시간의 풍파를 견뎌낸 건축물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경기전의 주춧돌이 저기 놓인 지 어언 6백여 년, 전동성당도 어느새 백 년 넘게 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하며 이제 함께 늙어가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아마 처음에 저 곳에 전동성당이 처음 들어섰을 때는 그 풍경이 그리 조화롭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태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전동성당

 

잘 알려진 것처럼,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사후 3, 그의 아들 태종은 이곳 전주에 아버지의 초상을 모셨고 그때부터 전주는 태조의 영혼과 위광, 조선조의 출발을 상징적으로 기리는 도시가 되었다.

 

전주 이씨의 관향에 들어선 경기전은 지방에 있는 작은 종묘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감히 왕조의 본향인 이곳에서 왕조의 신성, 정통성에 대한 의문은 용납될 수 없었다. 엄숙한 권위, 왕조의 케리그마(kerygma)의 공간적 현신이 경기전이었다. 예교(禮敎)가 실질적 지배적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던 당시, 공경의 대상으로서 새 왕조를 연 태조를 능가할 존재가 조선조에 또 있을 수 없었다. 경기전은 새 왕조의 성소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영원에 대한 꿈만이 불멸일 뿐

 

임진년, 병자년을 거치는 동안 조선 왕조는 점차 쇠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회광반조(回光返照)에 해당했던 영정조 시대를 지날 무렵, 전 세계는 제국주의의 발호에 따른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고 있었으나 조선왕조는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가 우리에게 미칠 영향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 했고 주체적으로 대응하지도 못 했다. 쇄국은 비장한 결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대착오적이었다. 조선이 역사의 황혼 속으로 스러지자, 혹독한 20세기의 새벽이 열렸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의 전파 과정이 피로 얼룩져있다고 증언해준다. 현재 우리들이 종교를 바라보는 태도가 개인적인 것이라면, 근현대 이전의 종교는 대개 집단적 가치 판단의 최종 기준이기도 했다. 따라서, 새로운 종교의 도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었으며, 국제적 관계에서는 정치-군사-문화적 침탈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여, 하나의 종교가 뿌리내리기 전에 순교자의 피가 먼저 그 대지를 적셨다. 한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교의 유입과 정착, 천주교와 개신교의 도래전파 과정은 모두 피로 얼룩진 도정이었다.

 

지금 현재 전동성당 자리 또한 그런 곳이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를 낳은 신해박해(1791)와 그 뒤에 이어진 신유박해(1801)를 통해 종교적 신념을 자신의 목숨과 바꾼 윤지충과 유항검 등 순교자의 혈흔 위에 여기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전주성벽이 철폐되던 중인 1908년에 전동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철거된 풍남문 성벽 자재들은 전동성당 건축 부자재로 쓰였다고도 한다. 성당이 완공된 것이 1914년이니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진 때. 세상은 이렇게 변한 것이다.

나라는 망하고, 성문은 좌우 성벽이 모두 헐린 채 치욕으로 덜렁 남았으며, 경기전을 둘러싸고 있던 왕조의 광휘는 그 빛을 모두 잃어버렸다.

 

졸지에 식민지 백성이 되어버린 이들은 몰락해버린 왕조의 잔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애쌍하게 여기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왕조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 또한 컸을 것이다. 그 복잡한 시대의 흉중 속에서, 경기전에 대한 경외감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만다. 왕조의 성소는 차츰차츰 전주시민의 도심공원으로 바뀌게 된다.

 

경기전이 보유하고 있던 성소의 엄숙성은 전동성당에게 그 바통을 넘겼다. 100년 전, 전동성당은 음울한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이 지역에 새로운 성소로, 또 새로운 변화의 강력한 상징으로 떠올랐다.

 

경기전은 지나간 과거, 전동성당은 새로운 현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옥마을이 이 일대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전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다가동 일대에 자리를 잡자,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피해 이쪽에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고풍스럽게 보이는 한옥마을도 백 년 전에는 삐까번쩍한새 도회지였던 셈이다.

 

경기전

물론, 시간이 흐른 지금 경기전과 전동성당, 한옥마을은 누적된 시간의 층위에 상관없이 모두 오래된 곳이 되었다.

 

그리고, 한옥마을의 낡은 가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거나 새롭게 지은 한옥에 외래어로 표기된 간판을 가진 음식점, 커피숍, 공방들이 새롭게 들어서고 있다. 고색창연한 한옥 골목을 상상하고 한옥마을 찾아온 관광객들은 한옥 안을 치장하고 있는 모던풍경에 잠깐 놀랄 수도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한옥마을 모습이 이대로 십 년, 이십 년 흘러가면 또 그대로 새로운 전통이 되어 옛 전통에 합류하는 것

 

아마, 백 년 전에는 외래종교의 상징이었을 천주교 전동성당은 이제 우리 고유의 것이 되었다. 관광객들은 망설임 없이 전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시간 속에서 엄숙한 천주교의 순교 성소는 친숙한 관광 명소로 변하고 있다, 깊은 산속 외딴 절간에 등산객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천주교가 우리 안에 우리의 종교로 이렇게 녹아드는데 시간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 삶과 마음속에서 하나 되기 위한 천주교인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고, 마침내 전동성당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의 자산으로 여기게 된 우리 내부의 변화가 있었다.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 또 오래된 한옥마을과 새로운 한옥마을 사이, 성과 속, 전통과 현대의 사이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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