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 한 도시를 유지하는 힘을 생각한다

 

경기전 안, 관람객의 동선에서 약간 빗겨 선 곳에 덩그라니 서 있는 창고 건물이하나 있다. 전주가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조선 전기 4사고(史庫)’ 중 하나였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에 조성한 건축물이다.

 

그 텅 비어있는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의 진정한 주인과 변화의 주체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조일전쟁 시기, 다른 곳의 실록은 모두 전화에 불탔으나, 이곳 전주사고본만이 보존되어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을 지금 우리가 보유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전주에는 조선왕조실록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몇 년 간에 걸친 복본화 작업을 통해 복사본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자칫, 전주시의 입장에서는 전주의 문화적 자산을 중앙 정부가 탈취해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간 사이 사초를 보관하던 창고는 텅 비었다마치, 출산을 한 어머니의 훗배처럼

 

전주사고

 

하지만, 그렇게 전주는 기록과 출판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주사고와 완판본의 구체적인 물증이라 할 서책들은 장성한 자식이 되어 전주를 떠났지만, 자신을 낳고 기른 어머니, 전주시에 전통을 보존하고 기록한 위대한 출판도시라는 영예를 남겨주었다고 비유해보면 어떨까?

 

전주사고를 볼 때마다, 나는 전통을 대하는 현대인의 자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 살던 조상이 남겼다 하여, 지금 여기 사는 우리가 독점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우리 또한 일시적으로 점유할 뿐, 전주가 낳은 자산들은 또 우리 후손들에게 인계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가운데, ‘전주산()’이었던 것들은 우리 문화 일반으로 승격되었다. 기껍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고, 지금까지 전주 사람들이 그렇게 해 왔다. 이건 우리만 가져야 되는 것, 이건 전주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고집을 피우고 오리지널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쩐지 전주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좀스러운일처럼 여겨진다.

 

 

 

전주는 낳고 키우고 내보내는 도시였다, 언제나 아낌없이판소리와 완판본과 서화와 비빔밥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 될 때까지그렇게 장성한 자식을 내보내고 난 뒤, 전주는 다시 또다른 문화 콘텐츠 양육을 시작했다. ‘전주대사습’, ‘전주세계소리축제’, ‘전주국제영화제는 요즘 전주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 과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예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다!

, 전주의 정신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더 큰 공유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여, 장성한 자식은 내보내는 어머니의 마음그리고, 그 빈 자리를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는 일로 채우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것.

 

경기전이 있었고, 전주사고가 있었고, 전라감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너진 자리에 우리는 전동성당과 한옥마을을 세웠다. 그리고, 또 한옥마을은 변해간다.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 한옥마을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일 뿐전주 사람들은 오래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전통과 혁신,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같은 추상적 어휘의 실제로 적용되는 경우는 나는 전주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기전을 나오고 나면 본격적으로 한옥마을을 탐방할 수 있다. 자신에게 편안한 방식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한옥마을을 둘러보면 된다. 그냥 걸어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지만,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면 한나절, 아니 하루를 모두 써도 부족한 것이 한옥마을 여행이다. 그만치 한옥마을에는 많은 콘텐츠가 담겨 있고,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몇 군데만 예를 들어 본다. 전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향교에서는 이제 영화를 찍고, 가람 이병기선생의 난초향이 그윽하던 양사재에는 관광객들이 밤늦도록 정담을 나눈다. 살림집이었던 문화공간 봄에는 막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미래의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콩나물국밥집 골목이나 그 앞에서 새롭게 꿈틀거리는 지역 예술인들의 숨결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며, 언제라도 얼큰한 육자배기 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은 막걸리집들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도 작은 규모의 공방이나 음식점이 많다는 것이 순례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지금은 작지만 새로운 꿈과 새로운 시도의 기운이 한옥마을 곳곳에 알알이 숨어 반짝인다. 몰랐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순례자의 두 발과 두 눈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전주사고 앞 쪽문으로 나왔을 때 바로 마주치는 최명희문학관이다. 전주가 낳은 작가, 최명희는 전주의 자랑이지만 그의 작품 혼불은 한국문학의 자랑이 되었다. 나는 전주사고, 완판본과 같은 출판기록문화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최명희라는 작가가 혼불이라는 작품을 통해 새롭게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전통을 존중하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혁신하여 혼불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공간을 만들어낸 작가그곳에 가면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쓴 글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 아이들 중 몇 몇은 또 다른 최명희를 꿈꾸는 계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최명희를 존중하되, 자신만의 또다른 꿈을 설계하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

같은 공간,

다른 시간,

또 다른 꿈

 

 

풍남문에서 한옥마을까지 같은 자리이지만, 거기 흐르는 시간은 스스로 몸을 뒤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고 나가고, 또 앞물결은 뒷물결을 끌고 나간다. 문화란, 어쩌면 물결이 물결을 뒤집는 자기 혁신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는 것!

 

이제 막 한옥마을을 빠져 나와 남천교 다리 위에 서 있는 이가 있다. 앞으로 흘러오는 전주천 물결 위에 내려앉는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또 앞으로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사람이를테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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