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 화분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연탄공장 귀퉁이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저는 단 한 번도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 놀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금세 옷이 시커멓게 변할 것 같은 민망함도 있었지만, 
좁디좁은 단칸방에서, 
또 변변찮은 장난감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대부분 가난했던 80년대 초, 
어머니는 팬티 실밥을 뜯거나 상자박스를 접어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셨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저는 반장이 되었습니다. 
그때도 반장은 돈 좀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 차지하곤 했는데, 
친구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하는디, 뭐라도 해야 하는디
어느 밤 어머니는 알 듯 모를 듯하게, 
조금은 근심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하셨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산천에 꽃이 만발했던 그 해 봄
어머니는 1미터 높이나 되는 
큰 철쭉화분을 시장에서 사들고 학교로 오셨습니다. 
화장품 하나 제대로 없었을 터인데,
가장 예쁘게, 가장 환한 옷을 차려입고
어머니는 그 무거운 화분을 들고 학교로 오셔서
선생님께 인사하고, 멀찍이 아들을 보며 웃어보이셨습니다. 

반장 됐다는디, 기죽으면 안 되는디, 
뭐라도 핵교에 갖고가야쓰겄는디 고민고민하시다
서른 중반도 안 되었던 가녀린 어머니는
당신 몸만큼이나 된 큰 철쭉꽃을 끄엉끄엉 안고서
좁디좁은 시장 골목을 걸어, 횡단보도를 걸어,
몇 번이나 내려놓고 다시 들고 내려놓고 다시 들고 하다가

학교까지 오셨습니다. 

철쭉꽃 같이 환한 엄마의 세월이 그립지만,
지금도 철쭉꽃보다 예쁜 엄마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카카오스토리 김작가의 공감스토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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