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벽루, 내 마음을 향해 묻는다


한옥마을을 빠져나온 순례자는 이제 전주천을 만나게 된다. 전주의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고 '전주'라는 성읍이 태어나고 변화해온 과정을 모두 지켜본 물길이 전주천이다.

 

그 전주천의 물길이 막 전주로 진입하는 지점에서, 마치 사람들에게 지금부터 큰물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요량인지, 제 몸을 크게 한 번 비튼다. 그 굽이의 꼭지점에 서 있는 게 한벽루이다.

 

 

거기, 한벽루에서 내려다보면 전주천은 나를 향해달려오는 물결이다.

순례자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 저 먼 쪽 어디에서부터 전주천의 물결은 나를 향해세차게 달려드는 것이다. 마치 마중이라도 나왔다는 듯이, 혹은 이 물길이 끝이 어딘지 궁금하지 않니?, 물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벽루 앞에서 전주천은 제 몸을 뒤집어 소용돌이치며 흘러간다.

 

사실, 순례자의 도보 방향이 전주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백두대간 슬치 어름에서 시작된 전주천은 호남의 지형 특성에 따라 금만평야와 서해 바다를 향해 북서진(北西進)하고 순례자는 남동진(南東進)하는 탓에 생기는, 별스럽지 않은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 도심을 막 빠져나온 순례자에게 전주천의 물결은, ‘당신, 지금 길에 나섰군요. 어디로 갈 건가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특별한 존재처럼 보일 때가 많다.

 

아무리 짧아도, 여행이란 자신의 일상과 결별하는 일. 우리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잘 짜여진 정주(定住)의 공간이지만, 길에 나선다는 것은 낯설고 예측불가능한 유랑(流浪)의 물결을 내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 여행, 그리고 순례의 낯선 출렁임을 저 물결이 먼저 우리에게 예고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떠나야만 만나게 되는 것들순례길이란 그런 것들을 찾아나서는 길이다.

 

 

나를 향해달려오는 물결은 끊기는 법이 없다,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물음처럼, 그리고 그때마다 삶의 이정표는 늘 크게 흔들렸었다내가 얕게 흐르면 세상의 물소리도 시끄러웠고, 때로 물의 깊이를 응시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건 내가 잠시나마 마음의 풍파를 간신히 가라앉힐 수 있었기 때문

 

내 마음의 수심을 내려다보는 일과 이 물길의 시원(始源)이 어디인지 궁금해 하는 일은 사실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물음만 있되 답은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런 상념도 잠시, 순례자는 곧바로 작은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이 물길의 왼쪽 편으로 걸을 것인가, 아님 오른 편으로 걸을 것인가?

 

순례길 사무국에서 공식적으로 추천하는 길은 왼쪽 길이다.

하지만, 오른쪽 길에도 볼 것이 너무 많으니 고민이랄 수밖에두말 할 것도 없이 가장 좋은 방법은 양쪽을 오가며 모두 다 찾아보는 방법이겠지만우리는 누구나 모두 시간 속의 여행자들,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그래서일까, 난 오랫동안 이 전주천변의 한쪽에서 맞은 편 언덕을 건너다보는 일로 한 시절을 지낸 적이 있다. 봄의 이른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시름시름 이곳에 앉아 중바위를 보고 있노라면, 물 건너 저편에서는 꽃이 피고 지고 새순이 돋고 녹음이 짙어졌다가 낙엽 진 산 응달 아래 오랫동안 눈이 쌓여 녹지 않고 있는 풍경들이 물무늬처럼 흘러가곤 했다. 그러다가 물을 건너 반대편 산그늘 아래 숨어들면, 도시와 차량의 불빛들이 어룽이며 반짝이다 잦아들곤 했었다

 

그 시절에는 일찍 나이 들기를 희망했었는데, 지금은 그때 그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조금씩 그리워진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이쪽과 저쪽. 나이가 들어도 내 눈길은 언제나 건너편에 가 있다.

 

갈래길을 앞에 둔 순례자의 첫 번째 고민이 시작되는, 한벽루 앞으로부터 좁은목약수터 사이는 100여 년 전만 해도 전주부성의 남쪽 외곽 방위선이라 할 남고산성의 관문에 해당하는 곳. 전주천의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 길은 남쪽으로 만마관(萬馬關), 관촌, 임실, 오수, 남원으로 이어지는데, 조선시대엔 한양~통영 간을 잇는 길이라 하여 통영대로라고도 불렸었다.

 

당시 조선 제6로였던 이 길로 백의종군에 나선 이순신이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고, 춘향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이몽룡에게 전하기 위해 방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으며, 그 한참 뒤로는 척양척왜의 기치를 높이 든 동학농민군이 이 길을 가득 메웠던 적도 있었다.

 

현재, 주요 간선로인 17번 국도와 전라선 또한 크게 봐서 이 길과 행적을 같이 하고, 지금은 완주-순천간 고속도로까지 가세했다. 한 마디로, 우리 앞에 놓인 이 길은 아주 오래된 길이다. 그 오래된 길엔 오래된 시간과 함께 오래된 이야기도 즐비하게 깔려 있다.

 

결국, ‘나를 향해달려오는 전주천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역사 속으로 뛰어드는 길이며역사와 마주하는 일에는 늘 관점과 평가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전주천 왼쪽 길을 걸을 것인가, 오른 쪽으로 갈 것인가하는 선택의 문제 역시 어떤 역사적 풍경과 먼저 마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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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역사기행] 8. 전주사고史庫와 한옥마을

[우리땅역사기행] 7.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

[우리땅역사기행] 6. 풍남문 1

[우리땅역사기행] 5. 덕유산과 백두대간

[우리땅역사기행] 4. 강경의 몰락과 군산

[우리땅역사기행] 3. 지리산 이현상 비트

[우리땅역사기행] 2.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0년

[우리땅역사기행] 1. 망해사라는 상징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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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한 도시를 유지하는 힘을 생각한다

 

경기전 안, 관람객의 동선에서 약간 빗겨 선 곳에 덩그라니 서 있는 창고 건물이하나 있다. 전주가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조선 전기 4사고(史庫)’ 중 하나였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에 조성한 건축물이다.

 

그 텅 비어있는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의 진정한 주인과 변화의 주체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조일전쟁 시기, 다른 곳의 실록은 모두 전화에 불탔으나, 이곳 전주사고본만이 보존되어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을 지금 우리가 보유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전주에는 조선왕조실록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몇 년 간에 걸친 복본화 작업을 통해 복사본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자칫, 전주시의 입장에서는 전주의 문화적 자산을 중앙 정부가 탈취해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간 사이 사초를 보관하던 창고는 텅 비었다마치, 출산을 한 어머니의 훗배처럼

 

전주사고

 

하지만, 그렇게 전주는 기록과 출판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주사고와 완판본의 구체적인 물증이라 할 서책들은 장성한 자식이 되어 전주를 떠났지만, 자신을 낳고 기른 어머니, 전주시에 전통을 보존하고 기록한 위대한 출판도시라는 영예를 남겨주었다고 비유해보면 어떨까?

 

전주사고를 볼 때마다, 나는 전통을 대하는 현대인의 자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 살던 조상이 남겼다 하여, 지금 여기 사는 우리가 독점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우리 또한 일시적으로 점유할 뿐, 전주가 낳은 자산들은 또 우리 후손들에게 인계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가운데, ‘전주산()’이었던 것들은 우리 문화 일반으로 승격되었다. 기껍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고, 지금까지 전주 사람들이 그렇게 해 왔다. 이건 우리만 가져야 되는 것, 이건 전주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고집을 피우고 오리지널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쩐지 전주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좀스러운일처럼 여겨진다.

 

 

 

전주는 낳고 키우고 내보내는 도시였다, 언제나 아낌없이판소리와 완판본과 서화와 비빔밥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 될 때까지그렇게 장성한 자식을 내보내고 난 뒤, 전주는 다시 또다른 문화 콘텐츠 양육을 시작했다. ‘전주대사습’, ‘전주세계소리축제’, ‘전주국제영화제는 요즘 전주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 과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예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다!

, 전주의 정신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더 큰 공유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여, 장성한 자식은 내보내는 어머니의 마음그리고, 그 빈 자리를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는 일로 채우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것.

 

경기전이 있었고, 전주사고가 있었고, 전라감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너진 자리에 우리는 전동성당과 한옥마을을 세웠다. 그리고, 또 한옥마을은 변해간다.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 한옥마을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일 뿐전주 사람들은 오래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전통과 혁신,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같은 추상적 어휘의 실제로 적용되는 경우는 나는 전주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기전을 나오고 나면 본격적으로 한옥마을을 탐방할 수 있다. 자신에게 편안한 방식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한옥마을을 둘러보면 된다. 그냥 걸어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지만,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면 한나절, 아니 하루를 모두 써도 부족한 것이 한옥마을 여행이다. 그만치 한옥마을에는 많은 콘텐츠가 담겨 있고,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몇 군데만 예를 들어 본다. 전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향교에서는 이제 영화를 찍고, 가람 이병기선생의 난초향이 그윽하던 양사재에는 관광객들이 밤늦도록 정담을 나눈다. 살림집이었던 문화공간 봄에는 막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미래의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콩나물국밥집 골목이나 그 앞에서 새롭게 꿈틀거리는 지역 예술인들의 숨결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며, 언제라도 얼큰한 육자배기 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은 막걸리집들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도 작은 규모의 공방이나 음식점이 많다는 것이 순례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지금은 작지만 새로운 꿈과 새로운 시도의 기운이 한옥마을 곳곳에 알알이 숨어 반짝인다. 몰랐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순례자의 두 발과 두 눈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전주사고 앞 쪽문으로 나왔을 때 바로 마주치는 최명희문학관이다. 전주가 낳은 작가, 최명희는 전주의 자랑이지만 그의 작품 혼불은 한국문학의 자랑이 되었다. 나는 전주사고, 완판본과 같은 출판기록문화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최명희라는 작가가 혼불이라는 작품을 통해 새롭게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전통을 존중하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혁신하여 혼불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공간을 만들어낸 작가그곳에 가면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쓴 글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 아이들 중 몇 몇은 또 다른 최명희를 꿈꾸는 계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최명희를 존중하되, 자신만의 또다른 꿈을 설계하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

같은 공간,

다른 시간,

또 다른 꿈

 

 

풍남문에서 한옥마을까지 같은 자리이지만, 거기 흐르는 시간은 스스로 몸을 뒤채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고 나가고, 또 앞물결은 뒷물결을 끌고 나간다. 문화란, 어쩌면 물결이 물결을 뒤집는 자기 혁신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는 것!

 

이제 막 한옥마을을 빠져 나와 남천교 다리 위에 서 있는 이가 있다. 앞으로 흘러오는 전주천 물결 위에 내려앉는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또 앞으로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사람이를테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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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역사기행] 7.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

[우리땅역사기행] 6. 풍남문 1

[우리땅역사기행] 5. 덕유산과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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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속(), 전통과 현대,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

풍남문 앞에서 팔달로만 건너오면 거의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경기전과 전동성당이다.

 

그리고, 그 사잇길인 태조로를 따라 이어지는 한옥마을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물결치는 것 또한 눈에 들어온다. 맛있는 국수나 팥빙수를 찾아서, 작은 공예품 공방에 머무는 눈길을 따라 걸음도 멈출 때, 사진 찍기 좋은 곳에 발길이 들어서는 자리, 곳곳마다 그 여행객을 응대하기 위해 또 사람들이 움직인다. 쉬는 법이 없다.이 거리에는 천 년 전에도 이와 같이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것이다, 때로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것이고 때로는 한적하기도 했겠지만, 이 거리가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오가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자리였음에는 지금과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 다만, 옛 사람들은 시간 속에 스러지고, 지금은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일 뿐

 

역사란 이렇게 흘러가는 사람들의 물결을 총칭일 터, 사람들의 자취가 가뭇없으니역사의 흔적을 좇는 우리 눈길은 시간의 풍파를 견뎌낸 건축물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경기전의 주춧돌이 저기 놓인 지 어언 6백여 년, 전동성당도 어느새 백 년 넘게 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하며 이제 함께 늙어가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아마 처음에 저 곳에 전동성당이 처음 들어섰을 때는 그 풍경이 그리 조화롭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태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전동성당

 

잘 알려진 것처럼,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사후 3, 그의 아들 태종은 이곳 전주에 아버지의 초상을 모셨고 그때부터 전주는 태조의 영혼과 위광, 조선조의 출발을 상징적으로 기리는 도시가 되었다.

 

전주 이씨의 관향에 들어선 경기전은 지방에 있는 작은 종묘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감히 왕조의 본향인 이곳에서 왕조의 신성, 정통성에 대한 의문은 용납될 수 없었다. 엄숙한 권위, 왕조의 케리그마(kerygma)의 공간적 현신이 경기전이었다. 예교(禮敎)가 실질적 지배적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던 당시, 공경의 대상으로서 새 왕조를 연 태조를 능가할 존재가 조선조에 또 있을 수 없었다. 경기전은 새 왕조의 성소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영원에 대한 꿈만이 불멸일 뿐

 

임진년, 병자년을 거치는 동안 조선 왕조는 점차 쇠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회광반조(回光返照)에 해당했던 영정조 시대를 지날 무렵, 전 세계는 제국주의의 발호에 따른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고 있었으나 조선왕조는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가 우리에게 미칠 영향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 했고 주체적으로 대응하지도 못 했다. 쇄국은 비장한 결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대착오적이었다. 조선이 역사의 황혼 속으로 스러지자, 혹독한 20세기의 새벽이 열렸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의 전파 과정이 피로 얼룩져있다고 증언해준다. 현재 우리들이 종교를 바라보는 태도가 개인적인 것이라면, 근현대 이전의 종교는 대개 집단적 가치 판단의 최종 기준이기도 했다. 따라서, 새로운 종교의 도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었으며, 국제적 관계에서는 정치-군사-문화적 침탈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여, 하나의 종교가 뿌리내리기 전에 순교자의 피가 먼저 그 대지를 적셨다. 한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교의 유입과 정착, 천주교와 개신교의 도래전파 과정은 모두 피로 얼룩진 도정이었다.

 

지금 현재 전동성당 자리 또한 그런 곳이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를 낳은 신해박해(1791)와 그 뒤에 이어진 신유박해(1801)를 통해 종교적 신념을 자신의 목숨과 바꾼 윤지충과 유항검 등 순교자의 혈흔 위에 여기 전동성당이 세워졌다. 전주성벽이 철폐되던 중인 1908년에 전동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철거된 풍남문 성벽 자재들은 전동성당 건축 부자재로 쓰였다고도 한다. 성당이 완공된 것이 1914년이니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진 때. 세상은 이렇게 변한 것이다.

나라는 망하고, 성문은 좌우 성벽이 모두 헐린 채 치욕으로 덜렁 남았으며, 경기전을 둘러싸고 있던 왕조의 광휘는 그 빛을 모두 잃어버렸다.

 

졸지에 식민지 백성이 되어버린 이들은 몰락해버린 왕조의 잔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애쌍하게 여기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왕조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 또한 컸을 것이다. 그 복잡한 시대의 흉중 속에서, 경기전에 대한 경외감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만다. 왕조의 성소는 차츰차츰 전주시민의 도심공원으로 바뀌게 된다.

 

경기전이 보유하고 있던 성소의 엄숙성은 전동성당에게 그 바통을 넘겼다. 100년 전, 전동성당은 음울한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이 지역에 새로운 성소로, 또 새로운 변화의 강력한 상징으로 떠올랐다.

 

경기전은 지나간 과거, 전동성당은 새로운 현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옥마을이 이 일대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전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다가동 일대에 자리를 잡자,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피해 이쪽에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고풍스럽게 보이는 한옥마을도 백 년 전에는 삐까번쩍한새 도회지였던 셈이다.

 

경기전

물론, 시간이 흐른 지금 경기전과 전동성당, 한옥마을은 누적된 시간의 층위에 상관없이 모두 오래된 곳이 되었다.

 

그리고, 한옥마을의 낡은 가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거나 새롭게 지은 한옥에 외래어로 표기된 간판을 가진 음식점, 커피숍, 공방들이 새롭게 들어서고 있다. 고색창연한 한옥 골목을 상상하고 한옥마을 찾아온 관광객들은 한옥 안을 치장하고 있는 모던풍경에 잠깐 놀랄 수도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한옥마을 모습이 이대로 십 년, 이십 년 흘러가면 또 그대로 새로운 전통이 되어 옛 전통에 합류하는 것

 

아마, 백 년 전에는 외래종교의 상징이었을 천주교 전동성당은 이제 우리 고유의 것이 되었다. 관광객들은 망설임 없이 전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시간 속에서 엄숙한 천주교의 순교 성소는 친숙한 관광 명소로 변하고 있다, 깊은 산속 외딴 절간에 등산객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천주교가 우리 안에 우리의 종교로 이렇게 녹아드는데 시간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 삶과 마음속에서 하나 되기 위한 천주교인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고, 마침내 전동성당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의 자산으로 여기게 된 우리 내부의 변화가 있었다.

 

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 또 오래된 한옥마을과 새로운 한옥마을 사이, 성과 속, 전통과 현대의 사이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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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역사기행] 6. 풍남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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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근점(圖根點) 혹은 길의 뿌리, 풍남문

누구나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가슴 설레는 단어들을 몇 개씩은 갖고 있다.

 

내게는 도근점(圖根點)’이라는 말이 그렇다. 지도와 같은 것을 그릴 때, 동서남북을 분할하는 중심 좌표, 그게 도근점이다.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때 화면을 9분할하는 일은 종횡이 교차하는 4개의 도근점을 먼저 찍어야 가능해진다순례길의 경우, 1~9코스가 시작되고 갈무리되는 각 지점이 이러한 도근점에 해당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단어를 도근점(道根點)으로 오독하기 시작했다.

길이 시작되는 곳, 길이 뿌리내린 곳

사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도근점이란 단어가 주는 울림은, 오독이 만들어낸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굳이 오독을 고집했던 이유는 도로원표(道路元標)라는 말이 너무 무미건조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낯선 도시에 들어설 때마다 내가 흘러들어가는 이 길이 마침내 멈추는 곳, 그리고 또 다시 활기찬 분기가 시작되는 곳을 찾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 여기서, 이 길들이 뻗어나가는구나, 자신이 뻗어나갈 앞자리에 무엇이 기다릴지 불안보다는 더 큰 기대를 안고 이 길은 여기서 이렇게 첫걸음을 시작하는구나!

 

순례길은 전주 풍남문에서 출발한다.

, 이 순례길의 첫 도근점, 떠나서 마침내 돌아와야 하는 자리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

풍남문 앞에서, 여장을 꾸리며 나는 생각한다.

왜 하필 이곳인가, 왜 이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았는가?

아마도 이 순례길을 처음 구상하고 설계한 이들도 스스로 자문했을 것이라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어디가 우리 순례길의 출발점이어야 하는가?

시점(始點)이 곧 시점(視點)이다. 왜 이 자리가 출발점인지 이해하는 것이 순례길전체를 이해하고 조망할 수 있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이 순례길은 어떤 기획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사진출처: 루비의 정원 

 

좌우 성벽을 대부분 잃은 채, 이제 두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풍남문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원 철창 안에 갇힌 호랑이가 떠오를 때가 있다. 한때, 시베리아에서 만주벌판, 백두대간을 벼락같이 종횡무진하였던 호랑이가 숫제 살아있는 박제 취급을 받으며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것처럼, 풍남문은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앙상한 잔해로 저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다.

 

지금은 이런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삼국시대~고려~조선으로 이어지던 지난 왕조 시절 내내 한반도는 성읍(城邑) 국가였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 곳곳의 주요 요충지는 모두 성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도읍지였던 서울도 그렇고, 정조가 신축한 수원화성도 그렇지만 이곳 전주 또한 천 년 이상 겹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성시(城市)였다.

 

수원화성

 

단단하고 커다란 집, 내가 이 성벽을 통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외침에 대한 방어의 역할 외에도, 성벽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소속감과 안도감을 안겨 주는 곳이 성이었다. 사대문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거주 자격을 갖춘 계층이 당대의 질서와 생활 방식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성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 안 사람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여기 전주성은 견훤이 후백제 건국을 선포하였을 때에는 왕성(王城)이었고, 경기전과 전주사고가 건립되던 시기에는 왕조의 발상지로 특별하게 관리되던 곳이었다. 따라서,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게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호남 최대의 군사적 거점과 병참을 상실했다는 것 이상의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전주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호남 전체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조선의 사직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1894년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했다는 것은 오래 된 왕조의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당시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버려야 하는가?’, 마음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혼란스러움과 새로운 각성을 안겨줬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1906년 일제 통감부의 철폐령에 의해 동문, 서문, 북문은 모두 헐린 상태에서 모질게 혼자 살아남은 저 풍남문의 존재란, ‘천 년 전주가 겪은 영광과 상처를 모두 집약하고 있는 상징물이 아닐 수 없다.

 

동양의 오랜 왕토(王土) 사상이 낳은 결과, 남쪽으로 난 길이나 대문(주작대로, 숭례문 등)은 왕화(王化)가 백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 나라 임금의 상징적 좌표는 늘 남면(南面)하고 있는 북극성(北極星)이었다. 신민들은 북대(北對)할 따름이었다. 전주 이남의 모든 신민은 저 풍남문 앞에서 저 먼 북쪽의 임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다. 풍남문은 전주에 현신한 왕조의 위풍당당한 수문장이었다.

 

  그랬던 풍남문이 이제 빗장의 기능은 모두 상실한 채, 간신히 고건축물로서의 가치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게 시간이고 역사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왕조도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풍남문은 남았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남은 것은 또 남아 엄연한 자취

 

지난 백 년 동안 한반도가 겪은 변화는 아마도 그 이전의 천 년, 이 천 년 시간을 모두 합해 놓은 것과 맞먹을 정도로, 압축적인 격변의 연속이었다. 그 돌연하고 엄청난 변화가 휘몰아친 전주의 백 년을 저 풍남문이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왕조의 정치, 문화, 물류, 교통의 중심지였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전주의 상징물이었던 풍남문은 옛 영화를 모두 다 상실한 대신, 이제 시대가 변화했다는 것을 제 몸으로 증언하고 있다. 옛 시대의 아이콘으로 제 역할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풍남문 반경 내에 함께 어깨 겯고 있던 것들도 풍남문과 그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전라도를 호령했던 전라감영 자리는 진즉에 사라져 복원마저 감감한 지경이 되었고, 그 자리에 일제에 의해 지어져 오랫동안 도청 건물로 기세등등하였던 옛 전주부청 건물도 어쨌건 곧 헐리게 될 것이다. 한때는 전주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다가동파출소 근처 표구점 골목. 운치 높게 고서화를 배첩하던 그 자리는 웨딩 타운에 물려주었고, 남부시장과 용머리고개 또한 예전의 성망을 되찾기는 좀처럼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원탑의 기억과 함께 전주 번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팔달로도 이제 사통팔달(四通八達)을 호언하던 때를 지나 그저 구도심을 상징하는 도로의 하나로 위치가 내려앉았다.

 

이렇게 풍남문과 풍남문 주변의 풍경들은 제 몸으로 역사가 되는 중이다.

 

그 많던 표구점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의아하지만 완판본다가서포가 사라진 것처럼 한 시대의 문물은 시대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다. 그렇다고 서러워하거나 아쉽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렇게, 또 새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돌과 흙과 나무로 이루어진 구조물이었으나, 시간 속에서 차츰차츰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존재가 지금 여기 서 있는 풍남문이다. 변화의 결과로 쇠락하였으나, 그 쇠락의 시간을 견뎌낸 탓에 또다시 전주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하는 자리에 서게 된, 시간이 빚어낸 역사적 인격’, 풍남문.

 

길을 걷다 보면 때로, 내 몸 전체가 바람 같은 것에 의해 관통당하거나 내 몸이 무엇인가를 꿰뚫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보이지 않는 어떤 시간층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풍남문 앞,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신발끈을 다시 조여맨다.




<이전 연재글 보기>


[우리땅역사기행] 6. 풍남문 1

[우리땅역사기행] 5. 덕유산과 백두대간

[우리땅역사기행] 4. 강경의 몰락과 군산

[우리땅역사기행] 3. 지리산 이현상 비트

[우리땅역사기행] 2.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0년

[우리땅역사기행] 1. 망해사라는 상징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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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따라 우리의 삶이 흘러왔다

 

릴케의 말년작 중에 대략 이런 내용의 시가 있다.

 

삶이란, 삶이란 항상 나의 밖에 존재한다

 

이 시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사실 크게 궁금하지도 않다. 때로 시인의 말은 우주적인 관통, 찰나의 깨침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니그런데도 내가 이 구절을 지금도 흥얼거리는 것은 아마도, 내가 금강 상류 지역인 진안에서 나고 큰 탓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지금은 용담댐으로 고인 물이 되었지만, 진안읍내에서 상전 월포, 수동을 거쳐 용담을 향해 세차게 흘러가던 금강 지류는 어린 시절, 내 상상력의 발원(發源)이었다.

 

내가 다니던 진안동국민학교는 그 물줄기를 따라 이어진 긴 방둑을 걸어야만 당도할 수 있었던 곳저 물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는 아침 저녁으로 그게 늘 궁금했다. 왜 가만 있지 못하는 것일까어디로 저리 바쁘게 자신을 휘몰아가는가구름이 이슬이 되고, 마침내 한바다에서 다시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현기증 나는 윤회(輪廻)가 저 강은 싫증나지도 않는다는 것인지무한한 시간과 공간 앞에서 절망하거나 궁금해 하는 사람이 어찌 파스칼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어떤 역사적 기점부터 한양을 겨냥한 활시위 같이 흐른다 하여 금강을 역수(逆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아마 중학교 때쯤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더 진안천 상류에 위치했다, 나의 강이 조금 더 길어졌던 시기그 이야기가 좀 우습게 들렸다, 여기서 보면 순행인 것을 어떤 이들은 역행이라고 부른다니사람은 자신이 속한 지세로부터도 이처럼 자유롭지 못 하다. 릴케 시를 읽었던 것도 이즈음이다.

 

자신을 늘 밖으로 밀고 나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난 어렴풋이 이 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금강 휘돌이는 덕유산으로 인해 시작된다

 

잘 알려진 말이지만, <산경표>의 국토관에 의하면, 산은 물을 넘지 못 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 한다. 금강의 태극형 휘돌이는 바로 이와 같은 산과 강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덕유산과 백두대간이 높이, 단단하게 휘감은 상류 지역을 진안고원이라 부르고, 금강과 섬진강이 여기서 발원, 하류 지역을 향해 흘러간다. 섬진강은 남행이고, 금강은 북행을 하다가 돌연 휘어져 서행한다. 이 또한, 지리학자들만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반도의 동고서저 지형, 땅의 기울기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물줄기의 흐름에 따라 사람살이가 좌르륵 펼쳐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상의 문명은 모두 강기슭에서 피어났다. 여기에 훈요십조에서 이야기했다는 차령 이남과 같은 조건이 합해지면서 금강이 흘러가는 길에는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가 함께 흘렀다. 우리가 교과서에 배운 한, 백제 전성기에는 한강~금강~만경강-동진강~영산강 유역까지 국력이 미쳤고, 미약할 때는 금강, 만경-동진강, 영산강 수계로 오그라들었다. 이를 크게 규정하는 것은 백두대간의 흐름, 더 좁혀서는 덕유산 자락이었다. 견훤의 후백제 역시 이 강줄기와 산줄기를 경계로 삼았다. 덕유 산자락 나제통문이 잘 보여주듯 백두대간은 신라와 백제를 나눈 국경이었고, 강 유역은 자고 나면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의 현장이었다.

 

이런 지리적, 역사적 조건은 우리의 국토관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 금강 유역에 핀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에 선홍핏빛이 스민 것은 주지의 사실, 금강 또한 우리에겐 붉은 해거름의 강이 되고 말았다. 의자왕이나 견훤의 고사는 물론, 근세 곰나루 동학군의 혈진 함성까지서해안 낙조를 보면서 슬픔을 느낀다면, 당신의 풍경관에도 역사적 감각이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쉽게 만나기 힘든 일출에 비하면 도시 한 가운데에서도 볼 수 있는 낙조야말로 일상에서 늘 접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한국인에게 유독 사랑을 받는다는 밀레의 <만종>을 보며, 우리는 겸허한 만족감을 느끼지 애절한 슬픔에 잠기진 않는다. 아마도 밀레의 그림 속에서 보는 이국적 풍경 속에서 역사적 상관성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풍경과 사람의 인식 사이에는 이처럼 역사적 선입관이 개입한다.

향적봉에서 남덕유로 이어지는 덕유산 종주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절로 한숨이 나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 덕유산 자락 저쪽 한 편에 뜬봉샘이 있다.

 

 

물뿌랭이라는 말과 뜬봉샘이라는 말

 

장수 신무산 기슭, ‘수분령바로 옆에 있는 뜬봉샘은 금강의 발원지로 공인된 곳이다. 장수(長水)라는 지명, 수분령(水分嶺)이라는 고갯마루,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천천(天川) 월곡(月谷)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마을까지이 근처 지명은 온통 과 관련이 있다.

 

뜬봉샘을 오르는 동안, 이곳 주민들이 친절하게 붙여놓은 안내판을 읽는다. 거기, 이곳이 예전부터 물뿌랭이마을이라고 불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옛사람들도 여기가 금강의 시원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겠다. 언젠가 유강희 시인과 더불어, 또 언젠가는 추석 가족 나들이로, 또 언젠가 혼자서 이곳을 오르는 동안, 난 왜 이 아름다운 이름 물뿌랭이를 버리고, ‘뜬봉()이라는 해괴한(?) 명칭을 채택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기 말고도 전라도 여러 산하에 두루 자취를 남긴 조선 개국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더니, 봉황이 훌쩍 날아갔다고 해서 뜬봉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인데설령 이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뜬봉샘은 600살 남짓, 물뿌랭이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개악(改惡)된 지명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또한 부질없다. 물뿌랭이든 뜬봉샘이든, 우리가 그 무엇이라 부르든, 그 훨씬 전부터 저 샘은 여기 샘솟아 흘러내렸다. 몇 만 년, 몇 억 년 내리 여기서 흘러 목마른 생명들의 목을 축였을, 성스러운 어머니 강 앞에서 고작 우리끼리 붙인 이름을 두고 맞네, 틀리네 왈가왈부하는 것이야말로 경망스러운 일.

 

용담호, 탑돌이 하는 길

 

난 용담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흥분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를 시정하고픈 마음은 없다. 수몰된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무덤덤한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다고 무엇이 바뀌는 것이 아닌 줄 번연히 알지만, 난 내 고향에 대해 최소한 그 정도 애정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나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

 

하여, 내게 용담호 주변을 둘러보는 길은 언제나 탑돌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용담호나 그 주변 풍경만 둘러보는 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으리라, 곳곳에 세워진 물망(勿忘), 비망(備忘)의 기록들.

 

난 거기 새겨진 글 혹은 명단을 찬찬히 더듬을 때마다 진진한 떨림을 느낀다. “천 년 만 년 흘러가도 잊지 못할 내 고향아 / 꿈속에서나마 다시 보면 내 어찌 그 꿈 깰고라는 투박한 새김에 가라앉아 있는 마음의 격한 떨림, ‘**’부터 00’에 이르는 이향민들의 이름까지

 

잊지 못 하는 것 혹은 잊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나를 아프게 한다. 투사(投射) 대상을 잃은 사랑만큼 애절한 사랑도 없다. 마음은 넘치는데, 보듬을 수 없는 사랑대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이 희미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여기를 떠난 사람들에게 시간은 물속에 갇혀버렸고, 땅은 사라졌다. , 그리워할 고향이 사라진 것이다. 고향에서 늙어가면서 어린 시절 잘 몰랐던 풍경들을 눈에 익히며, 마침내 그 자신이 풍경의 일부로 스며드는 것산다는 것은 그처럼 공간과 친화하고, 친화된 공간 속에서 소멸하는 일이다. 낡은 풍경, 늙은 얼굴들이 서로 교환(交歡)하는 곳이 고향이다.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일을 물길을 거슬러 근원에 당도하는 것과 같이 비유한다면, 여기를 떠난 사람들을 물길이 막혀 거슬러 오를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흘러갈 수도, 거슬러 오를 수도 없는 생애용담호가 생긴 뒤로 아침 안개가 부쩍 늘었다. 새벽에 이 길을 지나가다 보면 마치 수룡의 한숨처럼, 실향민들의 한숨이 엉겨 저 안개가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무리 한스럽게 생각해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담수된 용담호의 물은 완주군 고산의 배관 터널을 통해 전주, 익산, 군산 시민들을 향해 흘러가고, 새만금으로 인해 수질 보전이 더 크게 문제되는 동진강과 만경강의 역할 부담을 다소나마 줄여준다.

 

새로운 물의 흐름을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결국, 하나의 흐름이었던 금강은 용담호를 통해 고산 쪽으로 흐르는 새로운 용수 환경과 1980년대에 준공된 대청댐 수계로 나뉜 셈이 되었다. 한 나라였던 백제의 강역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들의 구획에 의해 충청도와 전라도로 나뉜 것처럼, 금강도 이제 대청호와 용담호 주위로 구분되게 된 것이다.

 

강의 생애도 이처럼, 강의 바깥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내 걸음은 이제 금강 물줄기를 따라, 백제의 흔적을 찾아간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 한다. 댐이 생기면 연어의 회귀가 불가능한 것처럼하지만, 진안을 떠난 이들의 삶이 금강처럼 여러 유역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이 길에 그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새로운 고향을 조성하고 살아가는지 알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나를 바깥으로 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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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역사기행] 4. 강경의 몰락과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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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이 자신을 경계하게 만든다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는 국토

 

서해는 언제나 신생하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강줄기 대부분이 서남해안을 통해 바다에 합류하는데다, 서해안으로 빠져나오는 강줄기 중 평야 지역을 관통하는 한강,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등은 해마다 막대한 양의 토사를 하구에 쏟아 붓는다. 정기적으로 준설을 한다 해도 서해안 강줄기들의 하상(河床)은 뭍에서부터 거기까지 밀고나온 퇴적물들로 인해 금세 바닥 수위가 높아진다. 거기 밀려온 각종 잡동사니들이 여기 모여 발효하듯, 순연(純然)해진다.

 

서해안 갯벌은 이와 같이 충적하천이 운반해온 퇴적층을 원 자양분으로 삼아 너른 유역으로 발달했고, 연안 어업의 터전이 되었다. 늘 뒤채고 바뀌는 몸마치 출산을 치르고 훗배를 앓다가 또 몸을 갖는 여인의 자궁처럼 서해안의 강과 바다는, 신비로운 해와 달의 주기에 맞춰 조금과 사리를 거듭하면서 몸을 푼다. 이런 점에서 서해안의 갯벌과 포구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강이 합심해 이룩한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해안 포구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다. 간척과 염전 확장, 항만 건설 등으로 인하여 서해안의 해안선은 몇 번씩 고쳐졌다. 남양만, 아산만, 천수만, 가로림만, 비인만, 영암만이 그렇게 사라지거나 대폭 축소되었으며,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서해안 해안선은 또 한 번 크게 수정되고 있다. 귀동냥에 의하면, 이와 같은 간석지는 지구 탄생 이래 오염 정화의 기능 외에도 홍수 억제 및 태풍의 피해 완화 등의 기능을 담당해왔다고 한다. 자연이 스스로 결정했던 자신의 운명이 이와 같이 인간의 때를 만나, 수난을 겪는 중이다.





 

물론, 국토와 그 땅을 점유한 사람들의 생애는 함께 영고성쇠를 겪는다. 특히 비좁은(?)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네는, 자신이 사는 터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싹~ 불싸지르고 이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를테면, 도망치고 도망쳐도 달아날 곳이 천지사방으로 터져 있던 중국 홍군의 대장정이나, 하루 종일 말을 달려 깃발을 꽂은 곳까지 모든 땅을 소유했다는 신대륙 침략의 방식 파 어웨이는 우리 국토 위에선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주검을 모셨던 방을 도배만 새로 하고 손자가 쓰는 것처럼, 한반도의 산하는 쓰고 또 고쳐 쓴 산하라고 할 수 있다. 갖은 전란 속에 다 파괴된 고향에 다시 들어가 재건을 하고 다시 땅을 일구고 살아온 것이 우리 국토의 내력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곳곳은 모두 켜켜이 역사가 쌓인 퇴적의 땅일 수밖에 없다. 만주나 연해주 혹은 대한해협을 넘어 일본으로 탈주했다는 이야기도 이미 오랜 옛이야기우리는 더 비좁아진 땅 위에서 서로 땀에 결은 어깨를 맞대고, 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 하는 처지라고 할 수 있다. 아미시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환경운동하는 분들이 배워 줄곧 하는 말 중에 후손들로부터 빌려 쓰는 땅이란 말들을수록 묵직한 것이 이런 까닭이다.

 

강경의 흥망성쇠논강평야와 황산벌 전투

 

부여에서 논산, 강경 그리고 익산까지 이어지는 길은 툭 터진 벌판길이다. 논산평야라고도 하고 논강평야라고도 하는 이 너른 벌판은 전적으로 금강에 의지한 미곡 산출지라고 할 수 있다. 서해, 종착지를 향해 달려온 금강의 숨결이 가장 가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논강평야보다 황산벌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나당연합군과 맞선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하필이면 이 자리를 자신들의 죽을 자리로 선택했는지, 이곳에 와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서해와 금강과 평야가 모두 어우러진 이 지역은, 왕궁이 있던 부여의 입장에서 보면 남면(南面)의 안마당과 같은 곳, 집에 쳐들어온 도적을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사직이 이미 기울고 화살은 떨어지고 창끝이 부러졌어도, 내줄 수 없는 자리, 제 뼈를 깎아 창을 삼더라도 지킬 수밖에 없는 안사람, 안방, 안채, 안마당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일찍부터 일치시킨 군인으로선 죽음이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는 방법일 때도 있다. 그게 북대(北對)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지키고 살아온 자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역사는 짓궂은 것이어서,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장면을 또 한 번 연출하기도 한다후일 부자간의 내분에 휩싸인 후백제군이 왕건의 군대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둔 마지막 대치를 벌이고,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이 마침내 다 무너지게 될 것임을 스스로 알게 된 견훤이 한 서린 눈을 채 감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자리 또한 이곳이다. 금강과 황산벌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제와 후백제가 마지막 숨을 거뒀다. 신라와 백제군의 주검 위에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주검이 쌓인 것이다.





그저 보기에는 풍요롭기만 한 이 벌판에 이렇게 뜨거운 피를 많이 흘린 역사의 탓일까.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던 6.25의 와중, 이곳에는 남한 최대의 신병훈련소인 2훈련소가 들어선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논산은 2훈련소가 있는 논산이다.

 

오늘도 연무의 입소대대 앞에는 연인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입영 장정들이 북적이고, 또 오늘 저녁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치고 갓 출소한 이등병 초짜 군바리들은 강경역전에 줄 맞춰 쪼그려 앉은 채 자신의 2년 청춘을 싣고 갈 자대행 기차를 혼곤한 표정으로 기다린다. 스물 둘 내 청춘도 강경역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흐르는 강물처럼, 사람들이 늘 흘러오고 늘 떠나가는 자리, 논산은 이처럼 삶과 죽음, 도착과 출발,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곳으로 이제껏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쨌건 이러저러한 연유로 군사도시의 이미지가 강하게 덧씌워진 바람에 논산은 개태사, 관촉사, 쌍계사와 같은 명승을 남들에게 자랑할 기회도 적었고, 공주-부여-금마로 이어지는 백제문화권에서도 사실상 부수적인 위치밖에 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후백제의 몰락 이후 이곳 논산의 살림은 현 강경읍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조선 시대 강경은 원산과 함께 2대항으로 손꼽혔고, 강경장은 평양, 대구장과 함께 전국 3대 장시의 하나였다. 이미 평정되어버린 백제후백제의 땅이 정치적군사적 역할을 추구할 수 있었겠는가. 천혜의 자연적 조건을 적절히 활용, 강경은 피와 쇠 냄새를 지우고 새로운 상업도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던 것이다.

 

극히 분주하고 소란스러움을 뜻하는 속담, ‘강경에 조깃배 들어왔다는 이런 배경 하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강경은 호서 지역 최대의 물류 유통 단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관공서가 논산 신시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논산경찰서 정도만이 남아 있지만, 강경의 골목 골목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강경이 누렸던 오랜 영화의 흔적이 여전히 단단하다. 1905년에 개교했다는 강경초등학교, 여전히 우람한 한일은행 지점 자리 등도 볼만 하지만, 강경 최고의 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옥녀봉에 올라야 볼 수 있다.

 

금강의 큰 줄기와 논강평야가 한 눈에 조망되고 뒤돌아서면 강경읍내 그 너머 황산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너르고, 이렇게 활짝 열렸으니 이곳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요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옥녀봉 저무는 석양 아래 감상해보시라. 자연 경관과 역사의 풍경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조선 후기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강경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1899년 더 아래쪽 금강 포구 진포가 군산항으로 개항하게 된 이후이다.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인천과 부산이 한반도의 주요 항구로 새롭게 부상하고, 강경시장이 갖고 있던 물류 유통의 기능을 군산항과 이리역에 넘기면서, 이제 강경은, 비슷한 시기에 항구의 기능이 대폭 축소된 곰소항 등과 더불어 젓갈 특산지 정도로만 알려진 곳이 되고 말았다. 서해안과 이 땅의 개땅쇠들이 겪은 소금 같은 세월이 발효시킨 음식이 젓갈이라면 강경이 젓갈 특산지가 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군산, 20세기 식민 근대의 살아있는 증거

 

군산은 한반도 근대화의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도시이다. 최무선의 진포대첩 이전, 천리 금강의 맨 끝자락에 자리한 이 포구는 역사적 존재감이 미미했었다. 아마 군산열도와 육지를 이어주는 배후지 정도의 역할이 진포에 부여된 유일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금강이 거둔 막둥이 자식과 같던, 그래서 갖은 집안일에서도 빠져 있던, 한가로운 어촌 진포의 운명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외세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 이후,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인천, 군산, 목포를 서해안의 주요 항구로 개발(?)하기 시작한 이후이다. 그동안 어떤 고을이 조금 더 크고, 어떤 마을이 좀 작은지를 결정한 것이 오랜 한반도 삶의 내력이었다면, 이제 외세가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한반도의 지도를 새롭게 그린 것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가 가장 공들여 그려놓은 것은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그 맨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소유욕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자본주의의 침탈은 식민지 내에 또다른 형태의 내부 식민지를 건설하는 결과로 드러난다. 자본은 노동과 재화를 자신의 식민 영토로 삼는다. 번영로가 잘 보여주듯, 식민지 거점 도시가 된 군산은 내포, 김제만경 평야, 전국에서 몰려온 인력을 내부 식민지에 거느리며 번성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생애가 가장 곤고할 때, 군산이란 도시는 이처럼 험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막내 순둥이가 마름의 얼굴로, 투기꾼의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제대로 된 축하나 보살핌 없이 서해안 허허벌판에 홀로 제 운명을 건설해야 했던 신도시 군산의 척박한 출발이런 탓인가, 해방이 되었지만 군산의 생애는 여전히 내놓은 자식의 그것처럼 험하게 풀려나갔다. 미군 진주와 함께 군산은 새로운 조차지(?)를 내줘야 했고, ‘아메리카타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갔다. 스스로 원한 바 없지만, 식민 지배의 전위가 되어야 했고, 주둔군에게 땅까지 내줘야 했으나, 이제껏 변변찮은 위로나 이해도 받지 못한 것이 20세기 군산이 감당해야 했던 운명이었다. 조선조 내내 금강의 하구의 막내 노릇을 했던 군산은 근대의 출발과 함께 마름이나 곳간지기의 역할을 강요당한 것이다.

 

군산 시내 곳곳에는 이런 역사의 변천을 증거하는 건물이나 스토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근대문화유산이란 명칭이 좀 해괴하긴 하지만, 군산은 20세기 한국 근대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임에 분명하다.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만 역사이겠는가. 치욕스럽다고 해서, 부정한다고 해서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것도 아니다. 20대 후반 3년 동안의 군산 생활 경험은, 내 마음 속에 우리 민족사에 대한 애증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금강하구언

 

현재, 군산은 새만금 간척사업이 완공되었을 때, 다시 한 번 크게 번성할 것으로 기대되는 지역이다. 20세기 한반도가 당한 외침의 상징과 같은 도시 군산이 이번에는 능동적인 간척 사업을 통해 21세기 동북아의 주요 거점으로 거듭날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긍정적인 의미에서, 난 군산과 새만금을 보면서, 이제 정말 20세기가 아니고 21세기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

 

하지만, 용담댐 건설과 수몰민의 양산, 환경 파괴 논란과 같은 직간접적 희생과 크기를 알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새만금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렇게 조국의 산하를 또 고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크게 고치는 일이다. 그 후과(後果)를 간척사업을 주도한 세대가 감당한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으나, 새만금으로 인해 얻게 될 이득과 손실의 대부분이 후대의 몫이라는 점을 생각하면난 아직도 새만금이 마뜩치 않다.

 

금강 휘돌이가 마지막으로 서해와 합류하며 크게 물지는 자리, 군산으로 우리 시대의 희망과 절망이 모두 쏟아져 들어간다. 그것이 어떤 버무려져 어떤 결과를 낳을지

 

나는, 군산이 20세기에 출발한 현재진행형의 도시라는 점과 또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쓴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하려고 애쓴다. 불안감이 때로 자신을 경계하게 만들지도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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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현상 비트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0년

망해사라는 상징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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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바람 소리, 가슴에 이는 바람 소리

우리가 통과한 시간의 터널

 

누구나 자신이 사는 당대가 가장 어렵게 마련이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어떻게 저 시대를 통과해왔나, 아득한 역사의 순간들이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900년 후백제가 개국을 선포할 때까지 백제의 유민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까, 1592년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사는 이 땅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1894년 동학군의 후예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레이황이라는 중국 출신 사학자는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책을 통해 잔잔한 역사의 수면 아래를 응시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나, 역사를 보는 시선이 평범한 우리로서는 격동의 세기가 빚어내는 시간의 용트림에 더 눈이 갈 수밖에 없다.

20세기

, 20세기! 우리가 얼마 전에 통과한 이 세기만큼 땀과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세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찝찔한 냄새가 싫어서일까역사책은 이 시기를 암호화된 숫자로 가르친다. 1905, 1910, 1919, 1931, 1937, 1941, 1945, 1948, 1950, 1953, 1960, 1961, 1980, 1987각기 을사늑약, 경술국치, 31운동,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해방, 남북단정(43 제주항쟁, 여순사건), 625, 휴전협정, 419, 516, 518, 6월 항쟁 등전자에 비해 전혀 친절한 게 없는 부가 설명의 어두컴컴한 행간 속에 우리가 힘겹게, 숨가쁘게 통과하는 사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훌쩍 21세기로 건너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쩌면 아직도 정면으로 응시해보지 않은 시대



지리산 빨치산의 삶과 쓰러져 저 홀로 외줄기 길이 된 나무의 삶이 닮았다

 

정갈하게 행군 삶에 대한 열망


시인 박두규 형과 구례에서 합류, 또다른 일행들이 기다리는 화개로 이동하는 동안 내 시선은 섬진강 물줄기를 쫓고 있었다.

10월말, 먼 것 같지만 금세 겨울 채비가 시작될 것이다, 가을이 되면 산과 들은 제 몸이 머금고 있던 물기를 최대한 말린다. 살을 줄이고 뼈를 단단히 하기 위한 일이다. 그렇게 물이 빠지는 신호가 단풍이나 누렇게 고개 숙인 볏줄기일 터물이 많은 지리산이다, 섬진강에는 지리산이 머금고 있던 체액들이 쏟아지면 가을 홍수가 난다, 여름 홍수와는 달리 땅밑에서 조용히 맑게 이뤄지는 홍수정갈한 가을 물에 행군 문장(秋水文章不染塵)을 평생 소원했던 옛사람들의 이름이 흐르는 강물에 반짝인다.

지금의 내게 있어 지리산은 박두규, 박남준, 이원규 시인이 살고 있는 땅이겠으나, 20세기 초엽 한국사는 구례를 매천 황현(18855~1910)의 땅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것으로 자신이 평생 걸어왔던 학문의 길을 최후로 완성했다. 매천과 면암과 같은 매운 선비 정신마저 없었다면, 경술국치 이후 한반도의 20세기 초엽은 얼마나 보잘 것 없이 쭈그러든 형상이었을까

화개에서 오늘 제5지리산 빨치산 활동터 모니터링모임을 함께 할 분들과 짧게 수인사를 나눈 뒤, 차량 3대에 분승하여 쌍계사 앞을 지나 의신마을삼정마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부슬비가 내릴 조짐이 있어 마음이 좀 급했다. 11명이 일행, 국시모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진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들의 모임활동가들과 공원 관리 전문가 그리고 글쟁이 네 명각기 살아온 영역이 다른 이들이 오늘은 한 마음으로 빗점골 일대 탐사를 목적으로 모인 것이다. 빗점골은 흔히 이현상 비트라고 알려진 빨치산 활동터가 있고,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평탄하게 느껴지는 이현상 비트 가는 길

 

강철 같은 의지, 불꽃 같은 삶에 대한 생각

이현상은 1905년 당시 전북 금산군 군북면에서 태어나 1953년 휴전협정 직후 이곳 빗점골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1963년 행정개편 구역에 의해 현재 충남에 속하지만 그가 태어난 금산군은 백제의 고토였고, 조선조 내내 전라도 진산군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현상은 전라도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920년 결혼한 그의 부인 또한 무주 출신 최문기 여사였고, 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당시 조선 3대 명문고보로 일컬어지던 고창고보에서 1~2등을 다투던 수재이기도 했었다좋은 시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전도유망한 평범한(?) 청년의 모습으로 윤택한 삶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해에 한반도는 실질적으로 국권을 상실했고 그가 숨을 거둔 해에 한반도의 운명은 상처와 원한만을 남긴 전쟁의 폐허 위에서 분단의 길에 들어섰다. 따라서, 이현상 뿐 아니고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생애는 시대의 고난과 절망 위에서 피고 질 수 밖에 없었다.

1926년 보성전문 법학과 재학중 610만세운동으로 6개월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그는 1928~19324년여 투옥, 1933~19385년여 투옥, 1940~19422년여 투옥 등 일제하에서만 12년 가깝게 수인 생활을 했으며, 1948년 여순사건 직후 지리산유격대 사령관을 맡은 이후 1950년 남부군 총사령을 거쳐 1953년 주검이 발견될 때까지 꼬박 5년 동안은 그야말로 풍찬노숙하는 산사람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의 연대기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식민지의 아들로 나고 성장해 조국의 분단 속에서 산화해버린 인물이다.

혹자는 그를 일러 20세기 낳은 전설적인 빨치산들인 체 게베라, 호치민, 마오쩌둥, 바티스타 등과 어깨를 겨룰만한 혁명아라고도 하고, 북에서는 그에게 제1호 애국열사증을 추증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모두 사후 가자(加資)라고 할 수 있다. 죽어 명예를 남기는 삶이 아무리 예우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살아서 겪은 모진 시련을 모두 위무하진 못한다.

시련은 영육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살인지 암살인지 혹은 피살인지, 피살이라면 경찰에 의한 것인지 군인들에 의한 것인지그의 최후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난 그의 말년이 뼛속까지 시린 고립감과 살점을 쥐어뜯는 고통 속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는, 후인들의 바람에 가까울 것이다.

, 세기도 20세기에서 21세로 바뀌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현상이란 이름을 들어본 세대들은 스러지고, 의 얼굴이 프린트된 옷을 걸치고 티없이 맑게 웃는 젊은이들은 늘어난다. 그들에게 빨치산 이야기나 임진왜란 당시 의병 이야기는 크게 변별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가슴에 검을 품고 남쪽 천리길을 달려왔네

 

비가 조금씩 내렸다 그쳤다 하는 동안 우리는 빗점골을 거슬러 오르는 계곡 산행을 계속했다. 그의 주검이 발견되었다는 너덜강과 이현상 비트를 답사하는 길에는 산죽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거기서 더 위쪽으로 빨치산들이 축전지용 소규모 발전을 했다는 폭포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거기부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산길인지라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현상의 주검이 발견된 지 어언 55, 무슨 흔적이 더 남아 있으랴만 일행들은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바위를 들쳐보기도 하고 나무 밑둥치를 들쑤셔보기도 했다. 그 풍경 또한 사실은 스산한 것이었다. 이현상의 최후를 지켜봤을 지리산의 나무나 바위들은 입을 열지 않으니 두런두런, 과연 이곳에서 빨치산들이 발전소를 운용했는지, 이현상의 주검이 누워 있던 바위가 이것인지 저것인지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한 후인들의 안타까움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

이현상 비트에는 누가 붙여놓았는지 이현상의 주검에서 발견되었다는 유시(遺詩)가 코팅 처리되어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리산에 풍운이 일어 기러기 떼 흩어지니 / 가슴에 검을 품고 남쪽 천리길을 달려왔네 / 오직 한 뜻, 한 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 / 철갑 두른 가슴에 붉은 피가 흐르네(智異風雲當鴻動 伏劒千里南走越 一念何時非祖國 胸有萬甲心有血)

한 때 열병처럼 이현상 루트를 답사했던 산객들의 발길도 드문드문한 지금, 지리산 바람만이 마치 독경이라도 하듯 이 시를 읽는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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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0년

망해사라는 상징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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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0년

이 길을 찾는 까닭

 

전라선이 닿는 곳은 사실 모두 한 동네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전주나 익산에서 순천, 여수에서 이주해온 이를 찾는 일이나 여수, 순천에서 전주 사람 찾는 일이 똑같이 어렵지 않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흐르는 경계 안에서 이 지역은 오랫동안 일종의 생활문화공동체 같은 것을 이루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탓인 듯… 이십년 넘게 나는 좀 먼 곳에 사는 친우를 찾는 마음으로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길을 다녔다.



혼자서 ‘대한민국 3대 산책로’ 같은 것을 꼽아본 적이 있었다.

누구나 이런 길들이 마음속에 있지 않겠는가.

그때 내가 꼽아본 구간은 여기 선암사~송광사 외에 앞서 언급한 내장사~백양사, 내소사~월명암 구간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절집에서 절집으로 이동하는 길들이어서 다섯 개, 열 개로 늘려 잡아 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쌍계사, 개심사, 화암사, 사성암, 도솔암, 상원사, 운문사…

고려조 이후 명산심곡에 터를 잡은 한국불교의 내력 때문에 억울해도(?) 할 수 없단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대한민국 절집의 90% 이상은 모두 산사(山寺)일 것이다. 또, 역으로 생각하면 이 절집들이 있어 이 산들이 명산으로 이름나고, 이만치라도 보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개 사찰들의 창건설화를 보면 ‘기운이 센 터여서 절집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비적들의 산채가 되기 십상이었다’라고 하지 않던가. 장소와 사람은 서로 삼투하고 서로 점유하는 것…

오래 다니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게 주어진 생애 속에서 나는 이 길을 몇 번 더 찾으며 한 해 한 해 나이를 더해 갈 것이다. 나이를 먹는 일은 아직도 내겐 두려운 일… 그 두려움을 나보다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은, 익숙한 이 길들이 달래줬다. 이게 내가 절집이 깃든 산과 계곡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 닿는 길

 

여행에는 종착지나 반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 끝엔 산정(山頂)이 있을 수도 있고, 뛰어난 경관이 있을 수도 있으나 여행의 귀착지로 사람, 그리운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단 게 내 생각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는 것만큼 마음 깊은 곳까지 설레이는 일이 또 있겠는가.

친구와 함께 순천역에 내리자 대학 선배로 여수 한려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전흥남 형이 마중을 나왔다. 후배가 온다고 일부러 짬을 낸 선배의 마음과 선배가 바쁠 걸 알면서도 전화를 한 후배의 마음이 이렇게 또 만난 것…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해보면 참으로 소중한 인연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식는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경우가 많아지는데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어느새 마음이 후끈해진다. 빗줄기가조금씩 비쳤지만, 걷기엔 큰 어려움이 없을 듯 하여 길을 재촉했다. 



오늘 세 사람이 함께 넘어가게 될 조계산(해발 884미터)은 여러모로 우리 문화사에 갚은 족적을 남기고 있는 명산이다.

우선, 한국 불교에 있어 이 산은 성지나 다름이 없다. 승보(僧寶) 사찰로 이름 높은 송광사는 ‘구산선문’의 선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조계종의 발원지이며, 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산이자 호국불교의 기치를 들었던 승병들의 집결지였던 현장이다. 그런만큼 두 종찰에는 한국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증언할 불교 유적과 선지식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있다. 호사가들은 두 절집을 경쟁적인 상태로 비교하길 좋아하나, 진정한 불교신자라면 그저 두 절집을 함께 둘러보는 것만으로 황홀한 터… 문학 독자들이라면 이 산은 <무소유>를 쓴 법정 스님이 거닐었던 산길과 조정래작가의 <태백산맥>의 무대로 기억될 것이다. 두 분 모두 이 산과는 삶과 문학의 인연을 동시에 맺었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서 오래 수행하였고, 조정래 선생은 대처승이자 시조시인이었던 조종현의 차남으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나는 이 산에 오면 가끔 이런 공상을 하곤 한다. 의천국사(1055~1101)와 지눌국사(1158~1210)가 시공을 뛰어넘어 굴목재 쯤에서 만나 서로 선문답을 주고받을 때 그 자리에 현 방장 스님들이 달려와 보리밥 시봉을 한달지, 법정 스님과 조정래 선생이 월출봉 쯤에서 만나 어느 절집의 앞마당이 더 깨끗하게 소제되었는지 즐거운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역시 이 지역 출신인 故 정채봉 작가가 불쑥 나타난달지…

산길을 걷는 동안 내가 이런 황망한 공상에 빠져드는 것은 이 길이 동행과 만남의 길인 탓일 게다. 선배와 만나 스승의 건강을 염려하고, 친구와는 함께 커나가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아직 해제되지 않은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도반(道伴)이 된다.

선암사 뒤편으로 한동안 잘 정비된 산책로를 지나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거기서부터는 길이 조금씩 가파르게 일어선다. 잠시 지나는 빗줄기로 생각했더니 점점 더 거세진다. 사실, 산길은 평범한 길은 아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도 길의 태반은 들에 난 길이었고, 어떻게든 산과 계곡을 피해보려고 악착같이 돌고 돌던 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짧은 거리라고 하더라도 만만한 산길은 하나도 없다. 더구나 조계산은 그리 높진 않지만 꽤 깊은 산이다. 산 둘레로 돌든 고개를 넘는 길을 택하든 이곳 산길은 옴팡하게 깊은 곳으로 그윽하게 이어진다.

결국, 우리 일행은 빗줄기가 좀 뜸해질 때까지 보리밥과 열무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 해 저물녁이 다 되어서야 송광사 경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일면식도 없는 처지였던 선배와 친구가 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중간 처지인 나로선 내심 서로 살아온 길이 많이 달라 이야기의 접점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이야말로 쓸데없는 기우… 이들은 이미 함께 산길을 걷는 사이 아니던가!



서로 닮아가는 것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송광사 쪽보다는 선암사의 풍경을 더 사랑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요사채가 선암사에 있고, 그 유명한 뒷간이며 와송이며 봄의 초입이면 선암사 뒤안에서 흘러 나오는 매화 향기에 사하촌의 녹차까지… 선암사와 관련된 모든 것이 기꺼웠다. 하여, 지금까지도 언제나 조계산 산행의 시작은 선암사 쪽이었다.

송광사의 풍경이 선암사에 미치지 못해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연못 한 가운데에 들어선 송광사 해우소며 그림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능허교, 천자암의 쌍향수, 비사리 구시를 찾는 설레임은 선암사와 또 다르게 내 마음을 흔든다.

그럼에도 내가 선암사를 먼저 찾는 이유는 아무래도 산사가 주는 고적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의 정수리부터 일직선으로 흐르는 산기(山氣)를 등으로 받고 서 있는 요사채, 깨끗하게 비질된 앞마당, 거기 혼자서 분주하게 묵언수행 중인 햇살들… 이게 나 혼자 생각하는 절집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이런 풍경을 살아오는 동안에 꼭 세 번, 무량사와 천은사 그리고 이곳 선암사에서 한 번씩 만났었다.

아마 이런 게 선입견일 것이다. 마음에 먼저 들어앉은 풍경이 뒤따라 들어선 풍경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 마음을 빈 구슬같이 해야 세상의 풍경이 다 들어온다지만, 평범한 속가인에게 이게 어디 쉽겠는가… 이런 사유로 선암사로 들어 송광사로 빠져나가는 길이 처음엔 여유롭고 나중엔 늘 급했다.

해거름, 비에 젖은 송광사 경내를 둘러보며 나는 처음으로 송광사의 경관 또한 선암사의 그것에 못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늦본 것인가, 이 풍경을… 생각하니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산길에 비를 만나고 동행한 이들과 탁배기 잔을 기울이느라 지체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그냥 지나쳤을 풍경을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새삼 생각하니 그렇다, 같은 산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절집이 어찌 서로 닮지 않겠는가, 그동안 다르게 보려고 했던 내 눈이 이 둘을 유난히 분별하였을 뿐… 두 절집이 여기 터를 잡고 이웃한 지가 근 천 년이다. 그런 면에서 한 이십 년만에 그런 걸 깨닫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문득, 선암사쪽 굴목재에서 만난 산객 일행이 떠올랐다. 유난히 머리가 짧아 금세 눈에 띄는 분이 둘 있었다. 한데, 두 사람이 장인과 사위 관계라는 것이 게 아닌가. 함께 한 일행들이 ‘장인이 저렇게 머리를 짧게 깎더니 사위까지 따라서 짧게 깎는다’고 흉 아닌 흉을 잡는다. 그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던 일행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보니… 서로 조금씩 모두 닮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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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사라는 상징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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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병용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망해사라는 상징

 

국토(國土)를 해독해야할 의미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들의 지도는 순식간에 상징으로 뒤덮이게 된다. 또, 단지 장소에 불과했던 한 공간에 누적된 시간의 흔적이 깊이 스며들게 되면, 그 곳은 이내 일종의 ‘공간성’을 획득하게 된다. 공간성과 결부된 지도 위의 상징… 그 의미는 웅숭할 수밖에 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 사는 우리들에게 ‘바다’는 과연 무엇일까, 엄연한 현실이면서, 또한 늘 꿈과 불안으로 출렁이는 비현실적인 공간대역… 바다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복잡한 심사를 잘 읽을 수 있는 곳이 난 김제시 진봉면 ‘망해사’라고 생각한다.





난 ‘망해사’라는 이름의 단순성이 좋다.

‘바다를 바라보는 절집’이란 이름에는 더는 땅 끝에서 한 발도 내딛을 수 없다는 한계의식, 그리고 바다 너머를 향한 열망이 직정적으로 드러난다.


낙서전(樂西殿)이나 청조헌(聽潮軒)이란 전각들의 이름도 그렇다. 노골적이고 그만큼 명징하다, ‘파도 소리를 듣는 집’이라니, 그 작명의 의도나 배경이 더할 수 없이 뚜렷하다. 이곳에만 오면 난 늘 ‘망해(茫海)’와 ‘망해(望海)’가 우연한 발음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망망하니까 하염없이 바라보라는 것,

파도 소리 밀려오니 듣고 있으라는 것…

더 내딛을 수 없다면, 발길을 멈추라는 뜻…

 

물론, 망해사에 우리가 볼 수 있는 바다는 현실의 바다이다. 하지만, 그 망망함으로 우리는 금세 눈길 둘 곳을 잃고 만다.


너무 많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땅 끝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그 바다는 어느새 추상이 되어 있다.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순간이다.

상(像)을 상(想)하는 힘(力), 마음속을 떠도는 어떤 그림을 실재하는 형상으로 잡아내는 것이 상상력이라면, 그 상상력의 무대로 망해사만한 곳도 드물다.

 

내 마음 속 쓰겁게 파도치는 바다와 해무에 뒤덮여 그야말로 오리무중인 바다가 망해사에서 만나, 마침내 오버랩되어 이중상이 합치될 때까지…

바다를 보고 또 바라본다.




해사는 머무는 절이 아니다, 운수행각승의 운명이 그렇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땅끝 망해사에 온 자, 결국은 바다로 한 발 더 나아가거나 그만 돌아설 수밖에 없다. 그러한 찰나의 머뭄 후에 새로운 여정, 혹은 귀환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여기 망해사, 동해의 낙산사, (동명의) 울산 망해사나 남해의 향일암, 보리암 같은 곳들이 있다.


네 영혼 푸르게 출렁이는가, 배에 오르며

 

다시 국토란 단어를 생각한다. 이 단어에 결부되어 있거나, 이 단어로부터 파생되는 수십 겹의 의미망은 매우 촘촘하다. 하지만, 경계(말하자면 국경)에서는 어느 정도 흐물흐물해질 수밖에 없다. ‘국토’의 어감은 단단하고 폐쇄적이지만, 아무리 배타적이라고 해도 어디에선가 피할 수 없이 ‘나와 다른 것’과 만나야 하고, 그 물렁물렁한 경계는 상호접촉에 의한 일종의 ‘하이브리드’ 상태를 이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에게 국경 개념은 조금 희박한 편이다. 삼면이 바다로 쌓여 있어, 육지상의 국경은 이북 쪽에만 존재하는 탓일 게다. 국경 아닌 국경, ‘휴전선’이 가져다주는 엄혹한 군사적 느낌도 최근 상당히 희석되어, 우리에게 국경이란 추상의 어떤 것에 더 가깝다. 최소한 이남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독도’ 분쟁이나 서행 상에서 중국 어선의 월경 혹은 우리 어선의 월경 등이 문제될 때에만 국경은 현실감 있는 단어로 다가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해, 남해, 서해는 우리의 방벽인 동시에 외국과 소통하는 일종의 출입국관리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기 섬들은…? 수동적인 관점에서는 초병이고, 능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외교 사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로부터 ‘남’에게 향하는 손짓 혹은 맞잡는 손… 조금 진부하지만, ‘육지문화’와 ‘해양문화’가 공존하고,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이 함께 자리하는 곳이 바다이고 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를 주유하길 원하는 영혼들이 설레는 걸음하는 곳…



곧 가게 될 어청도(於靑島)만 해도 그렇다. 어청도는 이 나라의 영해기선의 기준점 중의 하나이다. 중국과 한반도 간 해상 경계선을 가늠하는 기준점이며, 이 나라의 통치권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끝 섬 중 하나란 뜻이다.

쉽게 믿긴 힘들지만, 산동성에서 짖는 개소리가 들린다고 할만큼 중국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인지 어청도 최초의 정착민도 중국 사람, 전횡으로 알려져 있다. 초한 쟁패 시기, 제나라 사람 전횡이 가솔 500명을 거느리고 이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끝까지 추적해온 한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압송되던 중,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그를 기리는 사당, “치동묘”에 남아 있다. 절해고도들이 흔히 안고 있을 법한 비장한 전설중 하나이겠지만, 최소한 어청도가 중국-한반도간 연결점에 해당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천년 훨씬 이전부터 여기 뱃길이 있었다는 이야기, 나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 인류는 제 삶의 터전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유랑해왔으며, 바다라고 해서 발길을 잡아 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러하듯이…



어청도에 가려면 당연히 바다를 건너야 하고 배를 타야 하며 고군산열도와 같은 또다른 섬을 지나야 한다. 즉, 육지에서의 이동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출렁이는 바다 물결에 몸을 맡겨야 한다. 배를 탄다는 것은 이를테면 문턱을 넘는 것과 같다, 바다와 육지 사이의 임계선을 넘는 월경(越境) 행위… 그것은 조마조마한 불안을 불투명한 기대로 달래는 일이기도 하다.

 

키츠가 말했던가, “안전한 거주보다는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의 삶을 이끈다”

고군산열도, 어청도 가는 배는 군산여객선터미널에 출발한다. 대개의 출항이 그렇듯, 아침 일찍 배가 출발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자칫 하루 일정으로 모두 어그러질 수 있다. 아침에 출발한 배가 그대로 회항하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배가 가 닿는 섬은 당일로 돌아오기도 쉽지 않다.

 

배를 타는 순간, 육지와 바다의 경계는 순식간에 바다와 하늘의 경계로 뒤바뀐다. 하지만, 육지에서와 달리 그 경계는 명확치 않다. 낮게 가라앉아 무겁게 출렁이는 바다와 영원한 가벼움의 표상일 것만 같은 하늘은 경계선이 뭉개져 그 무게와 질감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특히, 여름 습도가 높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인간의 시계가 멈춘 곳에 흐릿한 경계선…

 

따라서, 바다에서 경계란 바다와 하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 떠있는 인간과 하늘 사이에 존재한다. 바다에서 바다란 뭍에서의 땅처럼 현실적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바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아니한가.

 

반면, 하늘은 변치 않는다, 가 닿을 수 없다는 진공의 공간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단단한 기반을 가진 육지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출렁이는 바다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그 의미 맥락이 남다르다.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높이가 바다와 맞붙어 수직으로 치솟아 있다, 광대무변한 출렁임과 불변의 불가촉성이 수평선에서 맞붙었다가 나뉜다. 배는 언제나 그 수평선을 향해 해무를 관통하며 항진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경계를 향해 가없이 물결을 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무란 바다와 하늘이 교접하며 내뿜는 안타까운 한숨처럼 보인다, 습기찬 열망…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의 거친 숨결로 자신의 욕망 너머를 향해 헤엄치는 일과 같다. 경계 너머의 경계, 욕망 너머 또다른 욕망… 그 속에는 쾌청함에 대한 욕망과 자신의 습기를 거둬 빳빳하게 말리고픈 욕망도 있을 것이다.

물결 위에서 습기를 말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바다에는 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모든 섬은 다 ‘빛’의 섬, ‘태양의 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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