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0년

이 길을 찾는 까닭

 

전라선이 닿는 곳은 사실 모두 한 동네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전주나 익산에서 순천, 여수에서 이주해온 이를 찾는 일이나 여수, 순천에서 전주 사람 찾는 일이 똑같이 어렵지 않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흐르는 경계 안에서 이 지역은 오랫동안 일종의 생활문화공동체 같은 것을 이루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탓인 듯… 이십년 넘게 나는 좀 먼 곳에 사는 친우를 찾는 마음으로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길을 다녔다.



혼자서 ‘대한민국 3대 산책로’ 같은 것을 꼽아본 적이 있었다.

누구나 이런 길들이 마음속에 있지 않겠는가.

그때 내가 꼽아본 구간은 여기 선암사~송광사 외에 앞서 언급한 내장사~백양사, 내소사~월명암 구간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절집에서 절집으로 이동하는 길들이어서 다섯 개, 열 개로 늘려 잡아 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쌍계사, 개심사, 화암사, 사성암, 도솔암, 상원사, 운문사…

고려조 이후 명산심곡에 터를 잡은 한국불교의 내력 때문에 억울해도(?) 할 수 없단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대한민국 절집의 90% 이상은 모두 산사(山寺)일 것이다. 또, 역으로 생각하면 이 절집들이 있어 이 산들이 명산으로 이름나고, 이만치라도 보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개 사찰들의 창건설화를 보면 ‘기운이 센 터여서 절집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비적들의 산채가 되기 십상이었다’라고 하지 않던가. 장소와 사람은 서로 삼투하고 서로 점유하는 것…

오래 다니다 보면 익숙해진다. 내게 주어진 생애 속에서 나는 이 길을 몇 번 더 찾으며 한 해 한 해 나이를 더해 갈 것이다. 나이를 먹는 일은 아직도 내겐 두려운 일… 그 두려움을 나보다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은, 익숙한 이 길들이 달래줬다. 이게 내가 절집이 깃든 산과 계곡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 닿는 길

 

여행에는 종착지나 반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 끝엔 산정(山頂)이 있을 수도 있고, 뛰어난 경관이 있을 수도 있으나 여행의 귀착지로 사람, 그리운 사람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단 게 내 생각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는 것만큼 마음 깊은 곳까지 설레이는 일이 또 있겠는가.

친구와 함께 순천역에 내리자 대학 선배로 여수 한려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전흥남 형이 마중을 나왔다. 후배가 온다고 일부러 짬을 낸 선배의 마음과 선배가 바쁠 걸 알면서도 전화를 한 후배의 마음이 이렇게 또 만난 것…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해보면 참으로 소중한 인연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식는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경우가 많아지는데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어느새 마음이 후끈해진다. 빗줄기가조금씩 비쳤지만, 걷기엔 큰 어려움이 없을 듯 하여 길을 재촉했다. 



오늘 세 사람이 함께 넘어가게 될 조계산(해발 884미터)은 여러모로 우리 문화사에 갚은 족적을 남기고 있는 명산이다.

우선, 한국 불교에 있어 이 산은 성지나 다름이 없다. 승보(僧寶) 사찰로 이름 높은 송광사는 ‘구산선문’의 선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조계종의 발원지이며, 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산이자 호국불교의 기치를 들었던 승병들의 집결지였던 현장이다. 그런만큼 두 종찰에는 한국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증언할 불교 유적과 선지식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있다. 호사가들은 두 절집을 경쟁적인 상태로 비교하길 좋아하나, 진정한 불교신자라면 그저 두 절집을 함께 둘러보는 것만으로 황홀한 터… 문학 독자들이라면 이 산은 <무소유>를 쓴 법정 스님이 거닐었던 산길과 조정래작가의 <태백산맥>의 무대로 기억될 것이다. 두 분 모두 이 산과는 삶과 문학의 인연을 동시에 맺었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서 오래 수행하였고, 조정래 선생은 대처승이자 시조시인이었던 조종현의 차남으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나는 이 산에 오면 가끔 이런 공상을 하곤 한다. 의천국사(1055~1101)와 지눌국사(1158~1210)가 시공을 뛰어넘어 굴목재 쯤에서 만나 서로 선문답을 주고받을 때 그 자리에 현 방장 스님들이 달려와 보리밥 시봉을 한달지, 법정 스님과 조정래 선생이 월출봉 쯤에서 만나 어느 절집의 앞마당이 더 깨끗하게 소제되었는지 즐거운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역시 이 지역 출신인 故 정채봉 작가가 불쑥 나타난달지…

산길을 걷는 동안 내가 이런 황망한 공상에 빠져드는 것은 이 길이 동행과 만남의 길인 탓일 게다. 선배와 만나 스승의 건강을 염려하고, 친구와는 함께 커나가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아직 해제되지 않은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도반(道伴)이 된다.

선암사 뒤편으로 한동안 잘 정비된 산책로를 지나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거기서부터는 길이 조금씩 가파르게 일어선다. 잠시 지나는 빗줄기로 생각했더니 점점 더 거세진다. 사실, 산길은 평범한 길은 아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도 길의 태반은 들에 난 길이었고, 어떻게든 산과 계곡을 피해보려고 악착같이 돌고 돌던 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짧은 거리라고 하더라도 만만한 산길은 하나도 없다. 더구나 조계산은 그리 높진 않지만 꽤 깊은 산이다. 산 둘레로 돌든 고개를 넘는 길을 택하든 이곳 산길은 옴팡하게 깊은 곳으로 그윽하게 이어진다.

결국, 우리 일행은 빗줄기가 좀 뜸해질 때까지 보리밥과 열무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 해 저물녁이 다 되어서야 송광사 경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일면식도 없는 처지였던 선배와 친구가 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중간 처지인 나로선 내심 서로 살아온 길이 많이 달라 이야기의 접점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이야말로 쓸데없는 기우… 이들은 이미 함께 산길을 걷는 사이 아니던가!



서로 닮아가는 것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송광사 쪽보다는 선암사의 풍경을 더 사랑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요사채가 선암사에 있고, 그 유명한 뒷간이며 와송이며 봄의 초입이면 선암사 뒤안에서 흘러 나오는 매화 향기에 사하촌의 녹차까지… 선암사와 관련된 모든 것이 기꺼웠다. 하여, 지금까지도 언제나 조계산 산행의 시작은 선암사 쪽이었다.

송광사의 풍경이 선암사에 미치지 못해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연못 한 가운데에 들어선 송광사 해우소며 그림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능허교, 천자암의 쌍향수, 비사리 구시를 찾는 설레임은 선암사와 또 다르게 내 마음을 흔든다.

그럼에도 내가 선암사를 먼저 찾는 이유는 아무래도 산사가 주는 고적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의 정수리부터 일직선으로 흐르는 산기(山氣)를 등으로 받고 서 있는 요사채, 깨끗하게 비질된 앞마당, 거기 혼자서 분주하게 묵언수행 중인 햇살들… 이게 나 혼자 생각하는 절집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이런 풍경을 살아오는 동안에 꼭 세 번, 무량사와 천은사 그리고 이곳 선암사에서 한 번씩 만났었다.

아마 이런 게 선입견일 것이다. 마음에 먼저 들어앉은 풍경이 뒤따라 들어선 풍경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 마음을 빈 구슬같이 해야 세상의 풍경이 다 들어온다지만, 평범한 속가인에게 이게 어디 쉽겠는가… 이런 사유로 선암사로 들어 송광사로 빠져나가는 길이 처음엔 여유롭고 나중엔 늘 급했다.

해거름, 비에 젖은 송광사 경내를 둘러보며 나는 처음으로 송광사의 경관 또한 선암사의 그것에 못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늦본 것인가, 이 풍경을… 생각하니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산길에 비를 만나고 동행한 이들과 탁배기 잔을 기울이느라 지체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그냥 지나쳤을 풍경을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새삼 생각하니 그렇다, 같은 산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절집이 어찌 서로 닮지 않겠는가, 그동안 다르게 보려고 했던 내 눈이 이 둘을 유난히 분별하였을 뿐… 두 절집이 여기 터를 잡고 이웃한 지가 근 천 년이다. 그런 면에서 한 이십 년만에 그런 걸 깨닫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문득, 선암사쪽 굴목재에서 만난 산객 일행이 떠올랐다. 유난히 머리가 짧아 금세 눈에 띄는 분이 둘 있었다. 한데, 두 사람이 장인과 사위 관계라는 것이 게 아닌가. 함께 한 일행들이 ‘장인이 저렇게 머리를 짧게 깎더니 사위까지 따라서 짧게 깎는다’고 흉 아닌 흉을 잡는다. 그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던 일행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보니… 서로 조금씩 모두 닮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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