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병용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망해사라는 상징

 

국토(國土)를 해독해야할 의미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들의 지도는 순식간에 상징으로 뒤덮이게 된다. 또, 단지 장소에 불과했던 한 공간에 누적된 시간의 흔적이 깊이 스며들게 되면, 그 곳은 이내 일종의 ‘공간성’을 획득하게 된다. 공간성과 결부된 지도 위의 상징… 그 의미는 웅숭할 수밖에 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 사는 우리들에게 ‘바다’는 과연 무엇일까, 엄연한 현실이면서, 또한 늘 꿈과 불안으로 출렁이는 비현실적인 공간대역… 바다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복잡한 심사를 잘 읽을 수 있는 곳이 난 김제시 진봉면 ‘망해사’라고 생각한다.





난 ‘망해사’라는 이름의 단순성이 좋다.

‘바다를 바라보는 절집’이란 이름에는 더는 땅 끝에서 한 발도 내딛을 수 없다는 한계의식, 그리고 바다 너머를 향한 열망이 직정적으로 드러난다.


낙서전(樂西殿)이나 청조헌(聽潮軒)이란 전각들의 이름도 그렇다. 노골적이고 그만큼 명징하다, ‘파도 소리를 듣는 집’이라니, 그 작명의 의도나 배경이 더할 수 없이 뚜렷하다. 이곳에만 오면 난 늘 ‘망해(茫海)’와 ‘망해(望海)’가 우연한 발음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망망하니까 하염없이 바라보라는 것,

파도 소리 밀려오니 듣고 있으라는 것…

더 내딛을 수 없다면, 발길을 멈추라는 뜻…

 

물론, 망해사에 우리가 볼 수 있는 바다는 현실의 바다이다. 하지만, 그 망망함으로 우리는 금세 눈길 둘 곳을 잃고 만다.


너무 많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땅 끝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그 바다는 어느새 추상이 되어 있다.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순간이다.

상(像)을 상(想)하는 힘(力), 마음속을 떠도는 어떤 그림을 실재하는 형상으로 잡아내는 것이 상상력이라면, 그 상상력의 무대로 망해사만한 곳도 드물다.

 

내 마음 속 쓰겁게 파도치는 바다와 해무에 뒤덮여 그야말로 오리무중인 바다가 망해사에서 만나, 마침내 오버랩되어 이중상이 합치될 때까지…

바다를 보고 또 바라본다.




해사는 머무는 절이 아니다, 운수행각승의 운명이 그렇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땅끝 망해사에 온 자, 결국은 바다로 한 발 더 나아가거나 그만 돌아설 수밖에 없다. 그러한 찰나의 머뭄 후에 새로운 여정, 혹은 귀환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여기 망해사, 동해의 낙산사, (동명의) 울산 망해사나 남해의 향일암, 보리암 같은 곳들이 있다.


네 영혼 푸르게 출렁이는가, 배에 오르며

 

다시 국토란 단어를 생각한다. 이 단어에 결부되어 있거나, 이 단어로부터 파생되는 수십 겹의 의미망은 매우 촘촘하다. 하지만, 경계(말하자면 국경)에서는 어느 정도 흐물흐물해질 수밖에 없다. ‘국토’의 어감은 단단하고 폐쇄적이지만, 아무리 배타적이라고 해도 어디에선가 피할 수 없이 ‘나와 다른 것’과 만나야 하고, 그 물렁물렁한 경계는 상호접촉에 의한 일종의 ‘하이브리드’ 상태를 이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에게 국경 개념은 조금 희박한 편이다. 삼면이 바다로 쌓여 있어, 육지상의 국경은 이북 쪽에만 존재하는 탓일 게다. 국경 아닌 국경, ‘휴전선’이 가져다주는 엄혹한 군사적 느낌도 최근 상당히 희석되어, 우리에게 국경이란 추상의 어떤 것에 더 가깝다. 최소한 이남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독도’ 분쟁이나 서행 상에서 중국 어선의 월경 혹은 우리 어선의 월경 등이 문제될 때에만 국경은 현실감 있는 단어로 다가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해, 남해, 서해는 우리의 방벽인 동시에 외국과 소통하는 일종의 출입국관리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기 섬들은…? 수동적인 관점에서는 초병이고, 능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외교 사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로부터 ‘남’에게 향하는 손짓 혹은 맞잡는 손… 조금 진부하지만, ‘육지문화’와 ‘해양문화’가 공존하고,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이 함께 자리하는 곳이 바다이고 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를 주유하길 원하는 영혼들이 설레는 걸음하는 곳…



곧 가게 될 어청도(於靑島)만 해도 그렇다. 어청도는 이 나라의 영해기선의 기준점 중의 하나이다. 중국과 한반도 간 해상 경계선을 가늠하는 기준점이며, 이 나라의 통치권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끝 섬 중 하나란 뜻이다.

쉽게 믿긴 힘들지만, 산동성에서 짖는 개소리가 들린다고 할만큼 중국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인지 어청도 최초의 정착민도 중국 사람, 전횡으로 알려져 있다. 초한 쟁패 시기, 제나라 사람 전횡이 가솔 500명을 거느리고 이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끝까지 추적해온 한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압송되던 중,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그를 기리는 사당, “치동묘”에 남아 있다. 절해고도들이 흔히 안고 있을 법한 비장한 전설중 하나이겠지만, 최소한 어청도가 중국-한반도간 연결점에 해당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천년 훨씬 이전부터 여기 뱃길이 있었다는 이야기, 나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 인류는 제 삶의 터전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유랑해왔으며, 바다라고 해서 발길을 잡아 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러하듯이…



어청도에 가려면 당연히 바다를 건너야 하고 배를 타야 하며 고군산열도와 같은 또다른 섬을 지나야 한다. 즉, 육지에서의 이동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출렁이는 바다 물결에 몸을 맡겨야 한다. 배를 탄다는 것은 이를테면 문턱을 넘는 것과 같다, 바다와 육지 사이의 임계선을 넘는 월경(越境) 행위… 그것은 조마조마한 불안을 불투명한 기대로 달래는 일이기도 하다.

 

키츠가 말했던가, “안전한 거주보다는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의 삶을 이끈다”

고군산열도, 어청도 가는 배는 군산여객선터미널에 출발한다. 대개의 출항이 그렇듯, 아침 일찍 배가 출발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자칫 하루 일정으로 모두 어그러질 수 있다. 아침에 출발한 배가 그대로 회항하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이나 두 번 배가 가 닿는 섬은 당일로 돌아오기도 쉽지 않다.

 

배를 타는 순간, 육지와 바다의 경계는 순식간에 바다와 하늘의 경계로 뒤바뀐다. 하지만, 육지에서와 달리 그 경계는 명확치 않다. 낮게 가라앉아 무겁게 출렁이는 바다와 영원한 가벼움의 표상일 것만 같은 하늘은 경계선이 뭉개져 그 무게와 질감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특히, 여름 습도가 높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인간의 시계가 멈춘 곳에 흐릿한 경계선…

 

따라서, 바다에서 경계란 바다와 하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 떠있는 인간과 하늘 사이에 존재한다. 바다에서 바다란 뭍에서의 땅처럼 현실적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바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아니한가.

 

반면, 하늘은 변치 않는다, 가 닿을 수 없다는 진공의 공간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단단한 기반을 가진 육지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출렁이는 바다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그 의미 맥락이 남다르다.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높이가 바다와 맞붙어 수직으로 치솟아 있다, 광대무변한 출렁임과 불변의 불가촉성이 수평선에서 맞붙었다가 나뉜다. 배는 언제나 그 수평선을 향해 해무를 관통하며 항진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경계를 향해 가없이 물결을 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무란 바다와 하늘이 교접하며 내뿜는 안타까운 한숨처럼 보인다, 습기찬 열망…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의 거친 숨결로 자신의 욕망 너머를 향해 헤엄치는 일과 같다. 경계 너머의 경계, 욕망 너머 또다른 욕망… 그 속에는 쾌청함에 대한 욕망과 자신의 습기를 거둬 빳빳하게 말리고픈 욕망도 있을 것이다.

물결 위에서 습기를 말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바다에는 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모든 섬은 다 ‘빛’의 섬, ‘태양의 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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