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근점(圖根點) 혹은 길의 뿌리, 풍남문

누구나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가슴 설레는 단어들을 몇 개씩은 갖고 있다.

 

내게는 도근점(圖根點)’이라는 말이 그렇다. 지도와 같은 것을 그릴 때, 동서남북을 분할하는 중심 좌표, 그게 도근점이다.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때 화면을 9분할하는 일은 종횡이 교차하는 4개의 도근점을 먼저 찍어야 가능해진다순례길의 경우, 1~9코스가 시작되고 갈무리되는 각 지점이 이러한 도근점에 해당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단어를 도근점(道根點)으로 오독하기 시작했다.

길이 시작되는 곳, 길이 뿌리내린 곳

사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도근점이란 단어가 주는 울림은, 오독이 만들어낸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굳이 오독을 고집했던 이유는 도로원표(道路元標)라는 말이 너무 무미건조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낯선 도시에 들어설 때마다 내가 흘러들어가는 이 길이 마침내 멈추는 곳, 그리고 또 다시 활기찬 분기가 시작되는 곳을 찾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 여기서, 이 길들이 뻗어나가는구나, 자신이 뻗어나갈 앞자리에 무엇이 기다릴지 불안보다는 더 큰 기대를 안고 이 길은 여기서 이렇게 첫걸음을 시작하는구나!

 

순례길은 전주 풍남문에서 출발한다.

, 이 순례길의 첫 도근점, 떠나서 마침내 돌아와야 하는 자리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

풍남문 앞에서, 여장을 꾸리며 나는 생각한다.

왜 하필 이곳인가, 왜 이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았는가?

아마도 이 순례길을 처음 구상하고 설계한 이들도 스스로 자문했을 것이라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어디가 우리 순례길의 출발점이어야 하는가?

시점(始點)이 곧 시점(視點)이다. 왜 이 자리가 출발점인지 이해하는 것이 순례길전체를 이해하고 조망할 수 있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이 순례길은 어떤 기획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사진출처: 루비의 정원 

 

좌우 성벽을 대부분 잃은 채, 이제 두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풍남문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원 철창 안에 갇힌 호랑이가 떠오를 때가 있다. 한때, 시베리아에서 만주벌판, 백두대간을 벼락같이 종횡무진하였던 호랑이가 숫제 살아있는 박제 취급을 받으며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것처럼, 풍남문은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앙상한 잔해로 저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다.

 

지금은 이런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삼국시대~고려~조선으로 이어지던 지난 왕조 시절 내내 한반도는 성읍(城邑) 국가였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 곳곳의 주요 요충지는 모두 성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도읍지였던 서울도 그렇고, 정조가 신축한 수원화성도 그렇지만 이곳 전주 또한 천 년 이상 겹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성시(城市)였다.

 

수원화성

 

단단하고 커다란 집, 내가 이 성벽을 통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외침에 대한 방어의 역할 외에도, 성벽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소속감과 안도감을 안겨 주는 곳이 성이었다. 사대문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거주 자격을 갖춘 계층이 당대의 질서와 생활 방식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성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 안 사람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여기 전주성은 견훤이 후백제 건국을 선포하였을 때에는 왕성(王城)이었고, 경기전과 전주사고가 건립되던 시기에는 왕조의 발상지로 특별하게 관리되던 곳이었다. 따라서,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게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호남 최대의 군사적 거점과 병참을 상실했다는 것 이상의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전주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호남 전체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조선의 사직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1894년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했다는 것은 오래 된 왕조의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당시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버려야 하는가?’, 마음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혼란스러움과 새로운 각성을 안겨줬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1906년 일제 통감부의 철폐령에 의해 동문, 서문, 북문은 모두 헐린 상태에서 모질게 혼자 살아남은 저 풍남문의 존재란, ‘천 년 전주가 겪은 영광과 상처를 모두 집약하고 있는 상징물이 아닐 수 없다.

 

동양의 오랜 왕토(王土) 사상이 낳은 결과, 남쪽으로 난 길이나 대문(주작대로, 숭례문 등)은 왕화(王化)가 백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 나라 임금의 상징적 좌표는 늘 남면(南面)하고 있는 북극성(北極星)이었다. 신민들은 북대(北對)할 따름이었다. 전주 이남의 모든 신민은 저 풍남문 앞에서 저 먼 북쪽의 임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다. 풍남문은 전주에 현신한 왕조의 위풍당당한 수문장이었다.

 

  그랬던 풍남문이 이제 빗장의 기능은 모두 상실한 채, 간신히 고건축물로서의 가치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게 시간이고 역사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왕조도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풍남문은 남았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남은 것은 또 남아 엄연한 자취

 

지난 백 년 동안 한반도가 겪은 변화는 아마도 그 이전의 천 년, 이 천 년 시간을 모두 합해 놓은 것과 맞먹을 정도로, 압축적인 격변의 연속이었다. 그 돌연하고 엄청난 변화가 휘몰아친 전주의 백 년을 저 풍남문이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왕조의 정치, 문화, 물류, 교통의 중심지였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전주의 상징물이었던 풍남문은 옛 영화를 모두 다 상실한 대신, 이제 시대가 변화했다는 것을 제 몸으로 증언하고 있다. 옛 시대의 아이콘으로 제 역할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풍남문 반경 내에 함께 어깨 겯고 있던 것들도 풍남문과 그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전라도를 호령했던 전라감영 자리는 진즉에 사라져 복원마저 감감한 지경이 되었고, 그 자리에 일제에 의해 지어져 오랫동안 도청 건물로 기세등등하였던 옛 전주부청 건물도 어쨌건 곧 헐리게 될 것이다. 한때는 전주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다가동파출소 근처 표구점 골목. 운치 높게 고서화를 배첩하던 그 자리는 웨딩 타운에 물려주었고, 남부시장과 용머리고개 또한 예전의 성망을 되찾기는 좀처럼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원탑의 기억과 함께 전주 번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팔달로도 이제 사통팔달(四通八達)을 호언하던 때를 지나 그저 구도심을 상징하는 도로의 하나로 위치가 내려앉았다.

 

이렇게 풍남문과 풍남문 주변의 풍경들은 제 몸으로 역사가 되는 중이다.

 

그 많던 표구점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의아하지만 완판본다가서포가 사라진 것처럼 한 시대의 문물은 시대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다. 그렇다고 서러워하거나 아쉽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렇게, 또 새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돌과 흙과 나무로 이루어진 구조물이었으나, 시간 속에서 차츰차츰 역사적 생명을 획득한 존재가 지금 여기 서 있는 풍남문이다. 변화의 결과로 쇠락하였으나, 그 쇠락의 시간을 견뎌낸 탓에 또다시 전주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하는 자리에 서게 된, 시간이 빚어낸 역사적 인격’, 풍남문.

 

길을 걷다 보면 때로, 내 몸 전체가 바람 같은 것에 의해 관통당하거나 내 몸이 무엇인가를 꿰뚫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보이지 않는 어떤 시간층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풍남문 앞,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신발끈을 다시 조여맨다.




<이전 연재글 보기>


[우리땅역사기행] 6. 풍남문 1

[우리땅역사기행] 5. 덕유산과 백두대간

[우리땅역사기행] 4. 강경의 몰락과 군산

[우리땅역사기행] 3. 지리산 이현상 비트

[우리땅역사기행] 2.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0년

[우리땅역사기행] 1. 망해사라는 상징 -불안전한 이동이 우리 삶을 이끈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아래 공감♥ 버튼을 눌러주세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