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행 역사여행 이야기 > by 박상용


3. 전주객사


객사.

한자를 쓰지 않으면 '객사'라는 두 글자만 갖고서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된다. 

객사(客舍) - 손님의 집. 

조선시대 객사의 주 기능은 호텔이었다.

공무를 갖고 출장하는 관리들이 묵어가는 곳.

전주 객사이니 전주에 있었을 것이고, 전주는 전라도의 중심이었으니 5성급 호텔쯤으로 생각해도 될런지?


호텔 기능외에 더 큰기능이 있었으니 바로 왕권을 상징했다. 

맨처음 부임지에 도착한 지방관은 객사에서 한달에 두번(보름때와 그믐) 예를 올렸다. 

누구에게? 그분. 

오직 한 분 임금님께.

성춘향을 구하러 온 이몽룡도 변사또를 객사앞에서 혼낸다. 

어사또는 임금을 대신해 감찰을 나왔으니 임금의 대행자이다. 


조선시대 객사는 조선의 행정조직인 부목군현 그리고 수영, 병영의 관아 안에 있었다. 'ㅇㅇ읍성' 이라고 하는 곳엔 객사도 함께 있었다. 

남아있는 객사건물이 몇있다.

낙안읍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나주읍성...

광주에도 읍성이 있었었다. 

그럼 객사도 있었겠네. 그렇다. 

그 유명한 진남관이나 세병관(내게만 유명한가?)도 객사이다. 


전주객사를 찾아간다. 

주차할 데가 없다.

고을 중심에 객사가 있었고, 전주는 객사인근의 교통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광주는 중심지가 되며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쯤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주는 '풍패(豊沛)'라는 명칭을 자주 쓴다. 

중국 한(漢)나라 이야기로 들어간다. 

중국에서 한나라는 중국문화의 기틀을 닦은 시기이다. 

소설 초한지에서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싸워 유방이 승리하여 중국을 제패한다. 장기판도 거기에서 나왔다. 

우리가 쓰는 중국글자가 한문이고 중국민족을 한족이라 부른다. 그만큼 중국인에게 있어 ‘한(漢)’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조선은 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해 건설되었다. 고려의 부패함도 있었지만 어쨌든 오백년의 왕씨 왕조를 뒤엎은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했다. 

인근의 중국에 나라이름을 구한다. 

중국의 허락이 필요하다. 어쩜 대통령되어서 맨처음 미국순방길에 오른 것과 같은 맥락일수도 있을 것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중국 풍현 패읍 출신이다. 풍과 패를 합쳐 풍패라 불렀고 전주이씨인 이성계가 이 곳 전주출신이니 자연스레 여기는 풍패를 사용했던 것이다. 성문도 남쪽은 풍남문이고, 서쪽은 패서문, 이 둘을 합친 풍패는 객사의 이름이다. 

그 현판의 크기가 가로 4미터  높이 179라고 한다. 내 키 만큼이다. (내가 조금 더 크다.)


현판의 글씨는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라는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직접 쓴 글씨다. 

중국에서 머나먼 길 건너 한양까지 그리고 다시 전주까지.

대국의 사신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주지번은 명나라 황태손이 태어났음을 알리러온 중국의 사신의 대표다.

그가 사신으로 왔을때 선조가 직접 교외에 나가서 영접했다고 했다. 물론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에 대한 은혜가 깊었기에 그러했을수도 있지만, 임금이 직접 나가서 사신을 영접했다는 것은 주지번의 직급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나름 꽤 직급이 있는 사신이었나 보다. 


주지번은 청년시절에 조선 선비의 도움을 받았다. 

그 조선선비는 익산에 사는 표옹 송영구이다. 

송영구는 1593년 임진왜란중에 정철과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간적이 있었다. 중국 명나라의 숙박지에서 묵고 있는데, 허드렛일 하는 젊은이가 책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꽤 어려운 책을.  

사연을 물으니 남쪽 지방사람인데 과거를 보러왔다가 돈이 다 떨어져 일하면서 공부한다고 했다. 총기있어 보이고 짠해 보이기도 하여 답안지 쓰는 요령을 일러주고 용돈도 쥐어주며 일은 조금하고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라고 응원해 주었다. 


중국 과거시험문제는 한문테스트이다. 

실제로 한자나 한문 원리는 중국인보다 조선의 선비가 더 잘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실용 영어 문법책은 외국어로 접한 일본인이나 우리가 원어민보다 더 잘쓴다. (나도 중국어 문법책을 출판했다. 중국인들이 내 중국어문법책 보고 깜짝 놀란다. 물론 내생각이지만.)


그가 과거에 급제해 사신이 되어 조선을 찾았고 표옹이 퇴직해 고향에 있음을 확인하고 익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내려오는 중에 전주객사에 들리게 되었고 그때 남겨진 글씨가 바로 “풍패지관”이다. 


전주객사의 현판 규모도 놀랍지만 그 현판 글씨 속에 들어있는 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면 답사의 맛이 살아난다. 


답사는 

그 공간에서 

시간을 넘어서는 

인간의 이야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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