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이 자신을 경계하게 만든다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는 국토
서해는 언제나 신생하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강줄기 대부분이 서남해안을 통해 바다에 합류하는데다, 서해안으로 빠져나오는 강줄기 중 평야 지역을 관통하는 한강,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등은 해마다 막대한 양의 토사를 하구에 쏟아 붓는다. 정기적으로 준설을 한다 해도 서해안 강줄기들의 하상(河床)은 뭍에서부터 거기까지 밀고나온 퇴적물들로 인해 금세 바닥 수위가 높아진다. 거기 밀려온 각종 잡동사니들이 여기 모여 발효하듯, 순연(純然)해진다.
서해안 갯벌은 이와 같이 충적하천이 운반해온 퇴적층을 원 자양분으로 삼아 너른 유역으로 발달했고, 연안 어업의 터전이 되었다. 늘 뒤채고 바뀌는 몸… 마치 출산을 치르고 훗배를 앓다가 또 몸을 갖는 여인의 자궁처럼 서해안의 강과 바다는, 신비로운 해와 달의 주기에 맞춰 조금과 사리를 거듭하면서 몸을 푼다. 이런 점에서 서해안의 갯벌과 포구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강이 합심해 이룩한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해안 포구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다. 간척과 염전 확장, 항만 건설 등으로 인하여 서해안의 해안선은 몇 번씩 고쳐졌다. 남양만, 아산만, 천수만, 가로림만, 비인만, 영암만이 그렇게 사라지거나 대폭 축소되었으며,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서해안 해안선은 또 한 번 크게 수정되고 있다. 귀동냥에 의하면, 이와 같은 간석지는 지구 탄생 이래 오염 정화의 기능 외에도 홍수 억제 및 태풍의 피해 완화 등의 기능을 담당해왔다고 한다. 자연이 스스로 결정했던 자신의 운명이 이와 같이 인간의 때를 만나, 수난을 겪는 중이다.
물론, 국토와 그 땅을 점유한 사람들의 생애는 함께 영고성쇠를 겪는다. 특히 비좁은(?)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네는, 자신이 사는 터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싹~ 불싸지르고 이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를테면, 도망치고 도망쳐도 달아날 곳이 천지사방으로 터져 있던 중국 홍군의 ‘대장정’이나, 하루 종일 말을 달려 깃발을 꽂은 곳까지 모든 땅을 소유했다는 신대륙 침략의 방식 ‘파 어웨이’는 우리 국토 위에선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주검을 모셨던 방을 도배만 새로 하고 손자가 쓰는 것처럼, 한반도의 산하는 쓰고 또 고쳐 쓴 산하라고 할 수 있다. 갖은 전란 속에 다 파괴된 고향에 다시 들어가 재건을 하고 다시 땅을 일구고 살아온 것이 우리 국토의 내력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곳곳은 모두 켜켜이 역사가 쌓인 퇴적의 땅일 수밖에 없다. 만주나 연해주 혹은 대한해협을 넘어 일본으로 탈주했다는 이야기도 이미 오랜 옛이야기… 우리는 더 비좁아진 땅 위에서 서로 땀에 결은 어깨를 맞대고, 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 하는 처지라고 할 수 있다. 아미시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환경운동하는 분들이 배워 줄곧 하는 말 중에 ‘후손들로부터 빌려 쓰는 땅’이란 말… 들을수록 묵직한 것이 이런 까닭이다.
강경의 흥망성쇠… 논강평야와 황산벌 전투
부여에서 논산, 강경 그리고 익산까지 이어지는 길은 툭 터진 벌판길이다. 논산평야라고도 하고 논강평야라고도 하는 이 너른 벌판은 전적으로 금강에 의지한 미곡 산출지라고 할 수 있다. 서해, 종착지를 향해 달려온 금강의 숨결이 가장 가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논강평야보다 황산벌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나당연합군과 맞선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하필이면 이 자리를 자신들의 죽을 자리로 선택했는지, 이곳에 와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서해와 금강과 평야가 모두 어우러진 이 지역은, 왕궁이 있던 부여의 입장에서 보면 남면(南面)의 안마당과 같은 곳, 집에 쳐들어온 도적을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사직이 이미 기울고 화살은 떨어지고 창끝이 부러졌어도, 내줄 수 없는 자리, 제 뼈를 깎아 창을 삼더라도 지킬 수밖에 없는 안사람, 안방, 안채, 안마당… 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일찍부터 일치시킨 군인으로선 죽음이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는 방법일 때도 있다. 그게 북대(北對)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지키고 살아온 자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역사는 짓궂은 것이어서,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장면을 또 한 번 연출하기도 한다… 후일 부자간의 내분에 휩싸인 후백제군이 왕건의 군대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둔 마지막 대치를 벌이고,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이 마침내 다 무너지게 될 것임을 스스로 알게 된 견훤이 한 서린 눈을 채 감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자리 또한 이곳이다. 금강과 황산벌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제와 후백제가 마지막 숨을 거뒀다. 신라와 백제군의 주검 위에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주검이 쌓인 것이다.
그저 보기에는 풍요롭기만 한 이 벌판에 이렇게 뜨거운 피를 많이 흘린 역사의 탓일까.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던 6.25의 와중, 이곳에는 남한 최대의 신병훈련소인 ‘제2훈련소’가 들어선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논산은 ‘제2훈련소’가 있는 논산이다.
오늘도 연무의 입소대대 앞에는 연인․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입영 장정들이 북적이고, 또 오늘 저녁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치고 갓 출소한 이등병 ‘초짜 군바리’들은 강경역전에 줄 맞춰 쪼그려 앉은 채 자신의 2년 청춘을 싣고 갈 ‘자대’행 기차를 혼곤한 표정으로 기다린다. 스물 둘 내 청춘도 강경역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흐르는 강물처럼, 사람들이 늘 흘러오고 늘 떠나가는 자리, 논산은 이처럼 삶과 죽음, 도착과 출발,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곳으로 이제껏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쨌건 이러저러한 연유로 ‘군사도시’의 이미지가 강하게 덧씌워진 바람에 논산은 개태사, 관촉사, 쌍계사와 같은 명승을 남들에게 자랑할 기회도 적었고, 공주-부여-금마로 이어지는 ‘백제문화권’에서도 사실상 부수적인 위치밖에 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후백제의 몰락 이후 이곳 논산의 살림은 현 강경읍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조선 시대 강경은 원산과 함께 2대항으로 손꼽혔고, 강경장은 평양, 대구장과 함께 전국 3대 장시의 하나였다. 이미 평정되어버린 백제․후백제의 땅이 정치적․군사적 역할을 추구할 수 있었겠는가. 천혜의 자연적 조건을 적절히 활용, 강경은 피와 쇠 냄새를 지우고 새로운 상업도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던 것이다.
극히 분주하고 소란스러움을 뜻하는 속담, ‘강경에 조깃배 들어왔다’는 이런 배경 하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강경은 호서 지역 최대의 물류 유통 단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관공서가 논산 신시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논산경찰서 정도만이 남아 있지만, 강경의 골목 골목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강경이 누렸던 오랜 영화의 흔적이 여전히 단단하다. 1905년에 개교했다는 강경초등학교, 여전히 우람한 한일은행 지점 자리 등도 볼만 하지만, 강경 최고의 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옥녀봉에 올라야 볼 수 있다.
금강의 큰 줄기와 논강평야가 한 눈에 조망되고 뒤돌아서면 강경읍내 그 너머 황산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너르고, 이렇게 활짝 열렸으니 이곳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요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옥녀봉 저무는 석양 아래 감상해보시라. 자연 경관과 역사의 풍경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조선 후기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강경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1899년 더 아래쪽 금강 포구 진포가 군산항으로 개항하게 된 이후이다.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인천과 부산이 한반도의 주요 항구로 새롭게 부상하고, 강경시장이 갖고 있던 물류 유통의 기능을 군산항과 이리역에 넘기면서, 이제 강경은, 비슷한 시기에 항구의 기능이 대폭 축소된 곰소항 등과 더불어 젓갈 특산지 정도로만 알려진 곳이 되고 말았다. 서해안과 이 땅의 개땅쇠들이 겪은 소금 같은 세월이 발효시킨 음식이 젓갈이라면 강경이 젓갈 특산지가 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군산, 20세기 식민 근대의 살아있는 증거
군산은 한반도 근대화의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도시이다. 최무선의 진포대첩 이전, 천리 금강의 맨 끝자락에 자리한 이 포구는 역사적 존재감이 미미했었다. 아마 군산열도와 육지를 이어주는 배후지 정도의 역할이 진포에 부여된 유일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금강이 거둔 막둥이 자식과 같던, 그래서 갖은 집안일에서도 빠져 있던, 한가로운 어촌 진포의 운명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외세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 이후,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인천, 군산, 목포를 서해안의 주요 항구로 개발(?)하기 시작한 이후이다. 그동안 어떤 고을이 조금 더 크고, 어떤 마을이 좀 작은지를 결정한 것이 오랜 한반도 삶의 내력이었다면, 이제 외세가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한반도의 지도를 새롭게 그린 것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가 가장 공들여 그려놓은 것은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그 맨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소유욕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자본주의의 침탈은 식민지 내에 또다른 형태의 내부 식민지를 건설하는 결과로 드러난다. 자본은 노동과 재화를 자신의 식민 영토로 삼는다. 번영로가 잘 보여주듯, 식민지 거점 도시가 된 군산은 내포, 김제만경 평야, 전국에서 몰려온 인력을 내부 식민지에 거느리며 번성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생애가 가장 곤고할 때, 군산이란 도시는 이처럼 험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막내 순둥이가 마름의 얼굴로, 투기꾼의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 제대로 된 축하나 보살핌 없이 서해안 허허벌판에 홀로 제 운명을 건설해야 했던 신도시 군산의 척박한 출발… 이런 탓인가, 해방이 되었지만 군산의 생애는 여전히 내놓은 자식의 그것처럼 험하게 풀려나갔다. 미군 진주와 함께 군산은 새로운 조차지(?)를 내줘야 했고, ‘아메리카타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갔다. 스스로 원한 바 없지만, 식민 지배의 전위가 되어야 했고, 주둔군에게 땅까지 내줘야 했으나, 이제껏 변변찮은 위로나 이해도 받지 못한 것이 20세기 군산이 감당해야 했던 운명이었다. 조선조 내내 금강의 하구의 막내 노릇을 했던 군산은 근대의 출발과 함께 마름이나 곳간지기의 역할을 강요당한 것이다.
군산 시내 곳곳에는 이런 역사의 변천을 증거하는 건물이나 스토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근대문화유산’이란 명칭이 좀 해괴하긴 하지만, 군산은 20세기 한국 근대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임에 분명하다.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만 역사이겠는가. 치욕스럽다고 해서, 부정한다고 해서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것도 아니다. 20대 후반 3년 동안의 군산 생활 경험은, 내 마음 속에 우리 민족사에 대한 애증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금강하구언
현재, 군산은 새만금 간척사업이 완공되었을 때, 다시 한 번 크게 번성할 것으로 기대되는 지역이다. 20세기 한반도가 당한 외침의 상징과 같은 도시 군산이 이번에는 능동적인 간척 사업을 통해 21세기 동북아의 주요 거점으로 거듭날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 긍정적인 의미에서, 난 군산과 새만금을 보면서, 이제 정말 20세기가 아니고 21세기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
하지만, 용담댐 건설과 수몰민의 양산, 환경 파괴 논란과 같은 직․간접적 희생과 크기를 알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새만금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렇게 조국의 산하를 또 고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크게 고치는 일이다. 그 후과(後果)를 간척사업을 주도한 세대가 감당한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으나, 새만금으로 인해 얻게 될 이득과 손실의 대부분이 후대의 몫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난 아직도 새만금이 마뜩치 않다.
금강 휘돌이가 마지막으로 서해와 합류하며 크게 물지는 자리, 군산으로 우리 시대의 희망과 절망이 모두 쏟아져 들어간다. 그것이 어떤 버무려져 어떤 결과를 낳을지…
나는, 군산이 20세기에 출발한 현재진행형의 도시라는 점과 또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쓴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하려고 애쓴다. 불안감이 때로 자신을 경계하게 만들지도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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